007 노 타임 투 다이 - 화장실 갈 시간이 없다 by eggry


 다니엘 크레이그 본드의 최신작이자 마지막 작품, 007 노 타임 투 다이(이하 노타임투다이)가 개봉했습니다. 백신 접종 했음에도 코로나 우려로 극장에 가급적 안 가고 있었는데 거의 1년 반만에 이 녀석이 저를 극장으로 가도록 해줬습니다. 아직은 제 안에서 007의 영향력이 남아있나 봅니다. 액션을 아주 꽉꽉 채워넣은 영화로, 극장 감상의 메리트도 확실히 있긴 했습니다.

 크레이그 본드는 오랫동안 심한 기복에 시달렸습니다. '카지노로얄'의 성공적인 출발 이후, 크레이그 본드는 당초의 불만감(007이 푸틴 닮았다)을 불식시키고 앞날이 창창해 보였습니다. 포스트 9/11 시대에 어울리는 리얼리티와 차가움은 현대에 맞는 본드 스타일을 제시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퀀텀오브솔라스'의 저조한 모습 이후 크레이그 본드는 계속 부침을 겪게 됩니다. 큰 이야기에서 후퇴해 본드 개인에 집중한 '스카이폴'은 호평을 받았지만, 다시 연작화에 시동을 건 '스펙터'는 스펙터와 블로펠드(그리고 크리스토퍼 왈츠라는 배우)라는 조커를 꺼내든데 비해서는 심히 유감스러운 결과물이었습니다.

 '스펙터'가 마지막 작품으로써 악당과 플롯을 포지션했기 때문에, 크레이그로써는 불명예스러운 작별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복잡한 어른의 사정에 의해 크레이그 본드가 한편 더 만들어지게 되었고, 크레이그는 007의 작별을 재시도 한다는 매우 귀한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스펙터는 석양 너머로 떠나는 영웅식의 결말이었지만, '노타임투다이'는 그 뒷이야기로 출발하는 만큼 좀 더 본질적 문제를 마주해야 했습니다. 거기서 꺼내든 것은 '카지노로알'에서 시작된 "의심 많은 직업병 남자"와 "비밀스러운 여자"라는 아이러니한 조합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점에서는 본드의 트라우마 극복기로써 수미상관이 잘 어우러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드라마가 아주 만족스러웠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레아 세이두와의 관계 이야기는 생각보다 싱겁게, 대충 넘어갑니다. 갈등에 더 많은 비중을 두기보다는 가족으로써의 모습에 더 비중을 둔 건 아쉬운 밸런스였습니다.

 '노타임투다이'는 또 본드의 (진짜) 마지막이라는, 매우 보기 드몬 플롯을 차지할 기회를 가짐으로써 본드의 유산에 대해서 성찰하는 기회도 덩달아 가집니다. 마지막은 본드에게 허락된 적이 없는 사치였습니다. 대부분 그냥 계약 끝나고 새 본드가 나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어갈 뿐이었으니까요. 많은 장면과 대사는 고전 명작들의 데자뷔를 불러 일으킵니다. 본드카 순례도 그런 팬서비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중의 악당과 음모도 극히 고전적입니다. '카지노로얄'의 돈세탁을 위해 카지노를 이용하는 테러리스트 같은 현실적인 면은 이제 없습니다. 그 대신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려는 비밀기지와 비밀결사가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액션도 이전보다 훨씬 쉽게 사람과 물건들을 파괴합니다. 액션 면에서는 프리 크레이그로 돌아간 느낌이 상당히 많이 듭니다.

 그런 반면, 과연 '노타임투다이'가 새로운(새로웠어야 할?) 본드의 본보기나 고전주의로의 회귀 둘 중 하나라도 확실히 챙겼는지는 의문이 남습니다. 물론 원흉의 절반 정도는 '스펙터' 때문이긴 합니다. 본드의 궁극의 적이어야 할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이미 물리쳐 버렸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새 악당을 내세우겠답시고,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부친살해하기까지 합니다. 클래식 007의 팬으로써 '스펙터'에 이어 두번이나 얼굴에 똥칠 당한 기분입니다.

 본드와 세계를 노리는 게 사실 그냥 블로펠드의 또다른 음모와 부활이었다면 그건 너무 뻔한 얘기긴 했을테지만, 그 대신 나타난 새 악당 사핀의 존재감은 아무래도 많이 약합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숀 코너리 시절 본드에서나 보았던 무국적적인 비밀결사의 맥락 없는 세계 파멸 계획 같은 것은 별로 이입이 안 될 따름입니다. 본드, 마들렌과의 관계성도 좀 억지스럽게 우기는 느낌입니다.

 크레이그 본드의 마무리로 보자면, 취약한 연결성을 생각하면 실질적으로 카지노로얄-스펙터-노타임투다이의 트릴로지라고 봐야할 듯 합니다. '퀀텀오브솔라스'는 호적이 파였고[...] 그 여파로 '스카이폴'은 독립된 이야기가 되었지요. 굳이 크레이그 본드의 모조를 찾자면 결국 당초 기대받았던 리얼한 대테러나 첩보 같은 게 아니라, 외강내유의 취약한 내면을 가진 본드의 개인사였다고 해야겠습니다.

 '카지노로얄'에서 시작된 본드의 트라우마가 궁극적으로 '노타임투다이'에서 정리되었기에, 최소의 숙제는 마무리한 듯 합니다. 반면 그 이외에는 너무 많은 토끼를 잡으려다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긴 러닝타임이 논란이 되는데, 사실 그정도 길이라도 됐기에 다 놓쳐버리는 꼴은 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래도 이것보다 좀 더 할 수 있진 않았나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이런 취약함 때문에 별5개 리뷰 공세에는 별로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다섯 작품 하는 동안 세 작품 평균 이상을 남겼으면 종합실적이 평타 이상이지 싶습니다. 개인적으론 '스카이폴', '카지노로얄'이 1,2위이고, '노타임투다이'가 격차가 큰 3위입니다. 나머지 둘은 별로 우열을 가리고 싶지 않군요. 어쨌든 이로써 다니엘 크레이그와는 작별입니다.

ps.여성출연진들은 모두 좋습니다. CIA 요원이 조금 더 나왔으면 좋을텐데, 그럴 시간이 없었다는 건 이해합니다.



덧글

  • 잘생긴 허스키 2021/10/03 23:10 # 답글

    No time to Pee ㅋㅋㅋㅋ
  • 잘생긴 허스키 2021/10/03 23:13 # 답글

    퀀텀 재밌는데
  • realax 2021/10/04 03:07 # 삭제 답글

    스튜디오 요구 사항 체크하면서 기존 클리셰들을 이용해 편하게 연출할 수 있었던 <007>은 21세기에 와서 사라진지 오래죠. 그 이후 나름대로 새로운 시도들은 계속 나오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스카이폴>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더군요. 일단 샘 맨데스 감독도 두 번은 못 만들었으니까요. 그리고 <로건>도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 KittyHawk 2021/10/04 11:35 # 답글

    또다른 문제가 사핀의 대량 학살의 동기인데 그가 내세우는 명분이 너무 모호하다는 감이 들게 만들죠. 작중에 이미 스펙터의 명단이 노출되었다는 정황이 나타났고 그 장면을 이용해 본드 입으로 '왜 이들을 대거 체포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이 나오고 M은 국제적 혼란을 우려해 기소를 봉인해뒀다는 식의 대화가 오가게 한 후 최후반부에서 본드와 사핀이 서로의 정의를 드러내는 부분에서 스펙터에게 가족을 잃은 사핀의 입으로 국가와 법이 제 구실을 못한다면 자신의 손으로 스펙터의 가담자들과 그 가족들까지 쓸어버리겠다는 말이 나오고 본드는 법을 넘어서 단죄한다면 또다른 악 내지 죄일뿐이라고 대치하는 모습이 나왔다면 그나마 대결구도라는 감이 들었을텐데 그 부분에서 너무 부실했다는 감이 들더군요.
  • f348 2021/10/06 14:09 # 삭제 답글

    물에서 저게 뭐하는 걸까?
    저게 인류에 큰 위험이 되는걸까?
    나노봇으로 인류를 죽일 수 있는건 알겠는데
    그래서 저 섬이 그래서 저 물에서 그래서 저게뭐??
    도대체 뭔데? 뭐하고 있는거야?
    아 잠깐 007이 딸과 아내를 구하러왔었지?
    아 빌런은 또 어딨었지?

    제 최악의 007이었습니다
    영상 초반에 007만의 몽환적인 사운드 뮤비가 시작되기까지가
    007이었습니다.
    007을 보는건지 테이큰을 보는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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