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침몰 2020 - 사이언스사루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by eggry


 넷플릭스 오리지널, '일본침몰 2020'입니다. 영화화도 된 SF 소설이 원작으로 영화는 2000년대 초에 국내 개봉된 적도 있어서 본 사람도 있을 겁니다. 전 학교에서 봤는데 딴짓해서 별로 기억은 안 나네요. 어쨌든 2020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으로, 일본이 침몰하는 재난영화라는 설정은 그대로지만 등장인물이나 내러티브를 완전히 새로 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참 상태가 심각합니다. 솔직히 전체 10화 통틀어서 정상적으로 흘러간다 할 만한 건 초반 2.5화에 마지막 0.5화(에필로그 격) 정도로, 대충 30% 정도만 멀쩡합니다. 멀쩡하다는 게 딱히 그 부분은 좋다거나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이상하지 않다는 정도일 뿐입니다. 2화 B 파트부터 뭔가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하는데, 3화~9화는 그야말로 의식의 흐름을 타고 마구 흘러갑니다. 사이비종교 나올 때가 제일 절정인데 그 이후도 별로 정상적이진 않습니다. 진짜 대마 빨고 만들었나 싶은 내용의 연속입니다.

 완급조절이란 개념이 거의 없어서, 처음 대지진 나고서 피난길에 오른 뒤에 재난의 진행은 거의 업데이트 되지 않고 심지어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는 침몰 자체도 그냥 "자고 일어났더니 일본 가라 앉았더라" 수준입니다. 내용 대부분은 진행 중인 재난이라기보다는 포스트아포칼립스 군상극 같은 식인데 아포칼립스 군상극이 아니라 포스트아포칼립스 군상극이라는 안정감이 참으로 기묘한 부분입니다. 대지진 난지 하루만에 세상 망한 것처럼 방탕+약탈+범죄 하는 거 보면 아포칼립스물과 포스트아포칼립스물의 구분을 못 한 흔한 사례라 하겠습니다.

 이 설정에서 내놓을 수 있는 이야기가 한정적인 건 사실입니다. 국뽕성이 있다는 건 어쩔 수 없고, 거기에 보편적인 휴머니즘 좀 끼얹는 정도가 한계겠죠. 그런 점을 감안해도 재료가 영 잘 쓰여진 거 같진 않습니다. 2020이란 숫자에 어울리게 조금은 현대적으로 업데이트 하려고 한 구석이 꽤 있긴 합니다. 일단 주인공 남매부터가 혼혈이고, 어머니는 필리핀인, 주요 조력자는 에스토니아인에 히키코모리가 된 육상선배 등이 나오고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의 궁극적 질문은 "국토가 사라지게 된 가운데, 무엇이 일본다움이고 무엇이 일본인인가" 일텐데, 그 점에서 주인공의 설정은 아주 잘 쓰일 수 있었습니다. 아유무는 그다지 토종 일본인들과 섞이는데 거부감이나 어색함이 없지만, 동생 고는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서 말하고, 일본을 싫어하며 서양을 동경하는 게임, 인터넷 중독자입니다. 재난 과정에서 일본인으로써 정체성 찾기 같은 얘기가 될 것 같겠지만, 그게 또 그렇게 흘러가진 않습니다. 사실 거기에 별로 관심도 없는 거 같아요.

 맨 마지막 에필로그로 가면 결국 일본 재건과 돌아오는 일본인들 같은 식으로 희망 얘기를 하는데, 이 엔딩은 처음 제작할 때부터 정해진 거였을 겁니다. 중~종반이 중구난방인 반면 여기서만 확고한 자세를 비추기도 하고요. 문제는 재난의 시작과 이 엔딩을 연결시킬 내러티브와 설득력에 노력은 커녕 관심조차 없는 것 같다는 거지요;; 그냥 막장 열도횡단 서바이벌 정도로만 나오니...

 재난이란 관점에서도 퍽퍽 죽어가는 걸로 리얼이니 뭐니 하고 싶은 거 같은데 그냥 퍽퍽 죽어가서 이게 뭐냐는 생각만 듭니다. 사람들이 참 갑작스럽게들 죽어가는데 거기서 상실의 허무함이나 무력감 같은 것보다는 엥? 이렇게 퇴장하는거야?+이젠 당신 차례군요+가끔은 역겹다는 생각 뿐입니다. 나중에 가면 한명씩 자기 희생식으로 퇴장하는데 이것도 너무 뻔한데다가 작위적이고... 그 희생 와중에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남는데 딱히 기준도 모르겠습니다.

 혐오감 말인데 일단 강간미수가 나오는 것도 아포칼립스 물이라지만 너무 생각 없이 조건반사적으로 넣은 거 같고, 맥락도 없는 섹스신은 그냥 당황스러울 뿐이고... 이쪽 시선으로 보자면 또 맨 마지막에 사라진 일본의 아카이브 자료로 일본 배우고 되살리기- 같은 게 나오는데 그 아카이브에 성인영화관 같은 것도 나오는 거 보면(그게 일본 문화가 아니라는 건 아니지만) 별로 생각 같은 건 없는 거 같습니다.

 사실 초반부터 작화가 무너지는 것만 봐도 제작이 순탄치 않았다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TV 애니로써야 드문 일은 아니지만 이게 그냥 TV 애니는 아니고 넷플릭스 오리지널이거든요. 진짜 제작비 지원 받아서 넷플릭스에 한번에 전 에피소드 다 푸는 그 방식이요. TV 애니 프로젝트가 무너지는 가장 흔한 경우는 방영 전 제작 완료된 게 3화 정도이고 나머지는 정해진 데드라인 맞춰서 쫒기면서 만드는데 중간에 스텝 꼬여서 넘어지면 도미노로 다 막장 된다는 건데, 이 방식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얘기란 말이죠.(이 방식의 품질관리 면에서 모범사례는 '바이올렛 에버가든'이겠죠. 내용은 그냥 그렇지만...)

 게다가 인터뷰 같은 거 보면 18년부터 프로젝트 시작 했다는데, 기획이니 뭐니에 잡아먹는 시간이 많았다고 쳐도 실제 제작에 시간이 부족했다고 하긴 어렵고, 물주가 넷플릭스인데 예산이 부족했다고 하긴 더 어려울테고... 게다가 역사가 길진 않아도 나름 그리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던 사이언스사루인데다 바로 직전 작품인 '영상연에는 손대지마!'도 딱히 문제는 없었단 말이죠. 프로젝트 자체는 '일본침몰 2020' 쪽이 더 길었을 것 같이 보이고요.

 이 작품의 총감독이자 사이언스사루의 얼굴마담인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은 사실 4월 1일 부로 퇴사해서, 그냥 기존 계약 남아있는 만큼 이름 올리기랑 검토 정도 일만 한 거 같긴 합니다.(그래서 유아사 자택에 마약 압수수색 할 필요는 없을 거 같네요) 실제 콘티나 핵심 제작에는 그렇게 심도 깊게 관여한 거 같진 않고... 그렇다고 쳐도 이 프로젝트는 꽤 오래된 프로젝트이고, 유아사 퇴사 전에도 충분히 일할 시간이 있었을 겁니다. 전체 플롯이나 내러티브 정도는 말이죠. 근데 그게 '일본침몰 2020'에서 제일 엉망인 부분이라 의문만 더해갑니다.

 '일본침몰 2020'의 꼴을 보면 절대 나쁘다고 할 수 없는 스케쥴, 예산 상황에서 기본도 제대로 안 된 녀석이 튀어나왔다보니 사이언스사루에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유아사 감독의 퇴사 자체가 그 전부터 내부문제가 심각했다는 걸 드러내는지도 모르지만 제작기간이 오버랩되는 '영상연'이 멀쩡한지라 더욱 미스테리일 따름이네요. 보면서 "역시 넷플릭스 눈 먼 돈이 개꿀이지!" 라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덧글

  • 2020/07/13 18:4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알트아이젠 2020/07/13 23:10 # 답글

    일본 개봉 기준으로 2019년 작이지만 [너와 파도를 탈 수 있다면]은 좋았는데.
  • ... 2020/07/13 23:17 # 삭제 답글

    1,2화 보다가 아무리 재난상황이라고 해도 너무 의미없이 시체가 날라다니는데 거북감이 들어 "이거 그 뭐냐, 장르가 호러냐?"고 생각해서 그 이상 못 보겠습니다.
  • ... 2020/07/13 23:18 # 삭제

    (개인적으로 호러 못 봄)
  • Nachito libre 2020/07/14 10:55 # 답글

    영화판은 쿠사나기 츠요시 (초난강)와 시바사키 코우가 출연해서 보긴 봤습니다만, 제법 지루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인상깊었던 것은 주제가 쪽인데, 가수가 무려 한국인이었으니...
  • Esprit 2020/07/14 16:17 # 삭제 답글

    저도 그저께, 어제해서 다 보긴했는데 무슨 완성도가 이모냥이냐 싶은 생각밖에 안들던데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건지도 모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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