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로 지브리 다시 보기(11) - 가구야 공주 이야기 by eggry


 비주얼 측면에서는 지브리에서 가장 이색적인 '가구야 공주 이야기'입니다.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마지막 작품으로, 13년 개봉 후 18년에 사망했습니다. 몇 년 전에 볼 때는 타카하타 작품들은 "...뭐야 이게" 하는 생각이 드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요즘 다시 보니 미야자키 작품보다 더 기억이 남는 게 많네요.


- 제목 그대로 '가구야 공주 이야기'는 통칭 가구야 공주 이야기라고 불리는, 타케토리모노가타리(竹取物語)를 애니화한 것입니다. 다만 플롯 자체는 엇비슷한데 실제 이야기의 골자는 꽤 달라지게 되었다는 내용. 죽순에서 나온 아이, 쿄로 데려가 규수로 키우려는 노부부, 덴노와 귀족들의 구애, 달로의 귀환 같은 기본적인 흐름은 거의 그대로지만 실상 이야기는 그와는 좀 달라지게 됐습니다.


- 사실 원작은 워낙 짧기도 하고, 고전소설인 만큼 인물의 표현이라거나 개연성이라거나 복선이라거나 그런 부분은 상당히 희박합니다. 인물의 복잡한 감정이나 생각 같은 건 매우 미약하게만 나올 뿐이고, 이야기는 그냥 휙휙 흘러가는 식이 대부분입니다. 뭐 굳이 말하자면 기껏해야 좀 복잡한 우화 정도의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걸 애니메이션화 하면서 현대적인 서사를 갖추기 위해 많은 내용이 첨가됐습니다.


- 지브리 작품 중 가장 이질적인 작화를 갖고 있습니다. 사실 그냥 일본 애니메이션 기준으로도 일반적이지 않죠. '고양이의 보은'도 약간 이질적인 작화라 생각했지만 이쪽은 스타일이 아예 다릅니다. 그래서 애니메이터들의 실험과 숙련 등까지 포함해 제작기간이 꽤 길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원작도 원래 사회비판적, 풍자적 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거기서 중점이 된 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덴노와 귀족을 비꼬는 것이었죠. 그런 점은 애니메이션에도 여전히 있습니다만 (소문난 가구야 히메를 보러 가겠다고 길거리 사람들 치면서 마차 달리는 등) 상대적으로 코믹하고 축소된 비중을 갖게 됐습니다.

그보다 더 크게 추가된 건 원작에서 개인표현이 거의 없었던 가구야 히메의 입장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아이라고 하지만 그냥 시골 아이들과 함께 자라오면서 인간적인 삶에 대한 욕구를 강하게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히메로 키워지는 과정에서 "히메는 인간이 아니군요" 라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가구야 히메에 중점을 둔다면 사실 꽤 페미니즘적인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 전체 플롯은 거의 그대로지만 크게 바뀐 부분이라면 미카도(덴노)와 스테마루입니다. 원작에서 미카도는 권력을 이용해 미녀를 손에 넣으려다가 총명함과 신묘함에 감탄해 소울메이트와 같은 관계가 됩니다. 월인들이 가구야를 마중 나올 때도 군대를 보내서 지키려 하죠. 가구야는 불사약과 날개옷, 시를 남겨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그 유명한 턱주가리와 뒤에서 감싸안기로 플러팅 하는 수준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스테마루는 시골에 살던 시절 골목대장 역할을 하던 동네 아이들 중 가장 연상인데, 가구야 히메와는 미묘한 애착 관계이가 헤어지게 됩니다. 스테마루와의 삶이 가구야 히메가 지상에서 꿈꾸던 것이었다는 게 분명하지만, 쿄로 온 뒤에는 그저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일 뿐이죠.

마지막 스테마루와의 장래는 결국 꿈에 지나지 않았고, 가구야는 달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리지널 캐릭터로써, 타카하타 감독이 원작과 가장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부분을 드러냅니다. 생로병사를 초월한 월인들의 삶도, 귀족들이 약속하는 부귀영화도 아닌 생동있는 삶을 말이지요.


- 월인들은 불교의 부처와 보살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달에서 내려오는 모습이라거나 제일 먼저 생각난 건 '보석의 나라'였는데, '보석의 나라'가 먼저 나온 거더군요. 물론 제작기간을 고려하면 영향은 없다고 봐야겠지만요. 원작에서는 월인의 상세한 비주얼에 대한 얘기는 없습니다. 두 작품이 월인을 불교세계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점이 불교관과 연관이 있는 거 같긴 한데 제 지식으로 모르겠고 찾아도 쉽게 나오지 않는군요.


- 가구야가 달에서 왔다는 건 원작과 공통이지만 어떻게 달에서 오게 되었나, 돌아가면 어떻게 되나 같은 부분은 없었는데 추가되었습니다. 지구는 월인들에게 유배지로써, 생로병사, 희노애락을 겪어야 하는 고된 곳으로 여겨집니다. 가구야의 죄는 그 지구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구야가 지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이전에 지구에 유배되었다가 돌아온 사람이 무의식에 남아 부르던 지구의 노래였습니다. 자연과 생을 부르는 그 노래로 지구에 흥미를 가진 죄로 유배되지만, 가구야는 왜 그 월인이 지구를 그리워하는 노래를 불렀는가 알게 됩니다. 죽음도 고통도 없는 달은 꿈 같은 세계이지만, 지상에서의 희노애락이 가져다주는 생의 실감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월인들이 가구야에게 옷을 입히자, 예언한대로 가구야는 기억을 잃고 월인과 같이 무감각한 모습이 되어 달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지구를 돌아보면서, 노래의 운율이 떠오르며 눈물을 흘립니다. 먼저 유배갔던 월인이나 가구야나, 기억은 잊혀졌으되, 겪었던 감정의 인상 만큼은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제 개인으로는 가장 와닿았던 게 이 메시지였습니다. 나이 먹어가면서 사실 상세한 기억들은 슬슬 잊어가고 있습니다. 그냥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기도 하고, 굳이 세세하게 기억할 필요가 없어서기도 하고, 뭐 당연히 노화 때문이기도 하겠죠. 하지만 강렬한 감정의 인상 만큼은 정확한 기승전결이 기억나지 않는데도 떠오르면 가끔 몸서리 쳐집니다.


- 타카하타 이사오는 '헤이케모노가타리'를 애니화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헤이케와 겐지의 겐페이 전쟁을 헤이케 관점에서 비극적으로 그린 고전으로, 타카하타의 영웅과 전쟁에 냉소적이면서도 인간을 동정하는 관점과 고전 비극이 만나면 아주 걸작이 되었을 듯 싶습니다만... 2D로 갑옷을 그리기 어렵다는 등의 이유로 미뤄지다가 2018년에 폐암으로 고인이 되고 맙니다. 3D로 '가구야 공주 이야기' 같은 그림을 낼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다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사실 지브리에서 일본 갑옷 하면 '모노노케히메'에서 중세 사무라이들이 약간 나옵니다만 그것도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타카하타가 보기에는 불충분했던 걸까요? 물론 '모노노케히메'에선 그냥 말 타고 활이나 좀 쏘는 정도였고 '헤이케모노가타리'라면 일단 수도 훨씬 많아야 하고 액션도 더 제대로 되어야겠습니다마는.

'헤이케모노가타리'의 만화적 재해석으로는 테즈카 오사무의 '불새' 난세편이 아주 좋았습니다. 특히 미나모토노요시츠네가 그리스 신화 영웅 수준의 인간백정, 후레자식으로 나오는 게 진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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