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로 지브리 다시 보기(5) - 붉은 돼지 by eggry


 잠깐 국외 출사 등으로 뜸했지만 다시 감상을 시작해봅니다. 이번엔 미야자키 하야오의 턴인데 '마녀배달부 키키'와 '붉은 돼지' 중 고민했으나...'붉은 돼지'로 했습니다.

- '붉은 돼지'는 미야자키 하야오란 인간을 이해하는데 있어 여러모로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그의 뿌리라고 하면 영원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언급되겠지만, 그건 정치적 이상성 같은 것이지 미야자키라는 인간의 이상성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나우시카'가 좀 더 세상에 대한 이야기라면, '붉은 돼지'는 미야자키 본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붉은 돼지'는 곧잘 파시스트와 파시즘에 저항하는 대사와 행동들이 미야자키의 정치성향을 드러낸다고 인용되는 작품입니다만, 실제로 작품 자체에선 그건 주변부에 지나지 않을 뿐 전체적으로는 탈정치적 면모가 강합니다. 마르코를 비롯해 비적들은 그냥 무법자일 뿐,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정치운동이 아닙니다. 공산주의도 민주주의자도 아니죠.

아나키스트이긴 하고, 미야자키도 아나키스트가 좌익보다는 더 맞는 정의라고 봅니다만, '나우시카'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소극적인 아나키스트입니다. 원래 아나키스트란 게 규합해서 저항하는 게 태생적으로 그다지 맞지 않기는 하지만, 사실 개인으로써도 파시스트에 그다지 대항하거나 하진 않습니다. 그저 도망치는 정도일 뿐이죠.


- 그럼 '붉은 돼지'에서 인간 미야자키의 어떤 점을 볼 수 있느냐면, 이건 그의 머리 속에서 벌어지는 놀이터입니다. 전간기지만 벨에포크적인 로맨티시즘이 넘치는 세계, 실물에서 따온 비행기들, 역동적인 3차원 동화 등... 특별히 뭔가 하려는 말이 있다기보다는 그가 순수하게 오락적으로, 취미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모아놨을 따름입니다.

그 와중에 반파시즘 정서가 드러나는 것은 그것도 미야자키의 일부라서지, 이 작품의 주구성원이라곤 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중요한 건 비행기나 소녀 같은 페티시즘이죠. 거의 어느 작품에나 드러나는 면이지만, 이토록 어떤 사명 같은 무게감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건 '붉은 돼지' 정도일 겁니다. 그렇게 미야자키의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에, 그의 모순도 잘 드러납니다.

마르코는 전쟁과 국가권력이 싫다고 하지만, 마르코의 경력과 비행기는 그 전쟁과 국가가 있어서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미야자키도 전쟁과 국가가 싫다고 하지만, 그것이 낳은 전투기나 탱크 같은 걸 좋아하는 걸 절대 그만두지 못 합니다. '나우시카'의 반기술적인 면모가 사상적으로 조금 더 정제되고 걸러져 모순을 줄인 것이라면, '붉은 돼지'의 페티시즘은 미야자키 본연의 모습입니다. 그 모순을 피하는 방법은 전쟁과 체제와의 충돌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이탈리아 공군이 비적들을 퇴치하려고 출동합니다만, 그들과는 제대로 마주치는 일조차 없습니다. 철저하게 무정부성과 페티시즘을 즐기다가 해산할 뿐입니다. 실제 이야기의 대부분은 지나의 사랑을 마주하기 꺼려하며 비행에만 몰두하는 마르코나 비행사들의 결투 이야기입니다. 로맨티시즘이죠.


- 전쟁과 파시즘에 염증을 느껴서 인간이길 포기한 마르코. 하지만 은둔자는 아니고 하늘과 비행기를 떠나보내지는 못 하는... 그냥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입니다. 순수한 소녀에게 구원 받는다는 것도 그렇게 보면 노친네가 자캐딸 치는 거 참 그렇구나- 라는 생각만 듭니다.


- 분명히 가상 세계임에도 각종 설정은 실제 세계의 것을 차용한 것이 흥미롭습니다. 심지어 국가는 대놓고 이탈리아이며,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이 압재자로 나옵니다. 옛 전쟁에서의 적국은 독일이 분명합니다. 사실 비적이라거나, 돼지가 되어버린 인간이라거나 명백한 판타지성이 있음에도 단순히 이미지만 따오는 수준을 넘어서 국가와 체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낸 건 신기합니다. 정작 그의 정치성이 더 강한 작품들은 완전한 판타지였는데도 말이죠.


- 마르코의 새 엔진에 GHIBLI가 적힌 것은 많은 이들의 눈에 띄었을겁니다. 사실 스튜디오 지브리(기블리가 맞는 발음입니다만)도 애초에 이 이탈리아의 바람 이름에서 나왔습니다. 이탈리아를 차용한 배경이니 당연히 그렇지만 이탈리아적 코드가 다양하게 나옵니다. 포르코라고 줄어서 불리지만 Porco Rosso는 그냥 붉은 돼지란 뜻입니다.

비행기를 고쳐주는 피콜로 공방의 작업과정이나 분위기도 카로체리아를 강하게 연상시킵니다. 뭐 노골적으로 말하면 페라리라고 해야겠죠. 빨간 도색도 그런 연상을 부추깁니다만 물론 빨간 기체를 타는 파일럿 자체는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입니다.


- 총격전을 합니다만 모티브가 된 항공기들은 경주용 비행기입니다. 그래서 실제 비행기를 참고했고 그 시기도 전간기에 해당하지만 보통 인식하는 2차세계대전 전의 전투기와는 형상이라든가 차이가 있습니다. 수상비행기 형태로 만들어지면서 변형이 된 것도 있고요. 사실 전쟁 하는 게 아니라며 살상력이 높은 탄은 쓰지 않겠다는 장면은 조금 궁색합니다.


- 동화가 지브리 작품 중 최고라고 하기는 좀 그럴지 모르지만, 최고의 3차원 동화를 보여주긴 합니다. 항공전의 특성 상 공간감은 필수적입니다. 요즘이라면 3D를 통해서 꽤나 수월하게 구현할 수 있는 공간연출이라 TV 애니메이션에서도 시도하기 어렵지 않지만, 이 시절에는 순전히 애니메이터의 능력으로 그려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과장된 기법은 물론 손그림이기에 오는 부정확성의 부차적 효과까지 겹치면서 매우 독특한 공간감을 선사합니다. 파편 등도 매우 호화스러워서 보는 맛이 쏠쏠합니다. 뭐 지브리 애니메이션이라면 당연하지만 지브리 작품에서도 3차원 동화가 이렇게 듬뿍 나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 대부분의 캐릭터가 캐리커쳐적이거나 하다못해 모범적인 아니메/망가 화풍인 반면 마담 지나만 혼자 포토리얼리즘적인 이목구비를 갖고 있습니다. 아예 돼지가 되어버린 마르코랑 비교하면 이게 정말 같은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등장인물 맞나 싶을 정도.


- 파시즘에 대한 반발과 비행기에 대한 애정은 결국 훗날 실화에 기반한 '바람이 분다'를 만들게 합니다. 이번에는 아예 자국을 무대로 말이죠. 사실 미야자키는 일본을 상대로 이야기하고 싶은 게 뻔한데 판타지 세계니, 가상의 이탈리아니 같은 걸로 돌려서 하니 별로 안 통해먹는다 생각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바람이 분다'도 잘 먹혔는지는 의문이지만... 자국의 실화다보니 주제의식은 '붉은 돼지'보다는 확실히 비중있습니다. '바람이 분다'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덧글

  • 소시민 제이 2020/02/21 00:33 # 답글

    저도 이걸 가장 좋아해서 애니랑 ost는 항상 듣네요.

    특히 마지막 엔딩롤에 나오는 곡은 청춘을 불사른 중년들의 애수랄까요...
  • NRPU 2020/02/21 09:38 # 답글

    요즘 오타쿠들은 현실을 보려하지않아(여자아이의 팬티를 그리며)
    미야자키 하야오 한줄요약
  • GNA 2020/02/21 09:40 # 삭제 답글

    결국 저 세계에서 불과 십여년 후 끔찍한 전세계적 전쟁이 벌어진다는걸 생각하면 뭔가 씁쓸하기도 합니다
  • 0000 2020/02/21 14:04 # 삭제 답글

    미야자키 할배의 자캐딸이죠.
  • 알트아이젠 2020/02/23 15:17 # 답글

    지브리 애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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