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로 지브리 다시 보기(4) - 바다가 들린다 by eggry


 미야자키 작품과 비 미야자키를 번갈아 보려니 이번엔 '바다가 들린다'입니다. 사실 '바다가 들린다'는 지브리의 전통적인 제작 형식에서 벗어난 작품입니다. 일단 극장판이 아닙니다. TV 스페셜 형식으로 어린이날에 방영된 일종의 TV용 단편이었죠. 러닝타임 면에서야 짧은 지브리 극장판들과 별 차이 없긴 하지만요. 극장판보다는 예산이 적은 편이긴 합니다. 동화 같은 것도 확실히 그렇고요.

- 원작은 소설인데, 삽화를 맡았던 콘도 카츠야가 지브리 연고가 있었기에 지브리 신인들 경험축적용으로 애니메이션화가 진행됐습니다. 총작감, 애니메이션판 캐릭터 디자인 등도 결국 콘도 카츠야가 하게 됐고요. 애니메이션화에 회의적이었던 것 같지만 딴 사람에게 맡기자니 미덥잖다고 생각했던 듯. 콘도 카츠야는 극장판 위주로만 하기로 유명합니다. 동화를 좋아해서 그렇다고 하는군요. 감독은 외부인인 모치즈키 토모미. 이후 지브리 작품은 없는 사람입니다.


-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작품을 상당히 싫어했다고 하는데, 스즈키 토시오는 "자기가 못 만드는 거라 시샘한 것"이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이게 정답인 거 같네요. 미야자키는 천재긴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과 하려는 것이 당연히 무한정인 것은 아니죠. 이력만 봐도 현실적인 청춘 얘기(라는 것도 사실 판타지지만)는 그다지 두각이 없는 걸 알 수 있지요. '바다가 들린다'는 정말 미야자키 하야오라면 만들지 못 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걸 넘어보겠답시고 '귀를 기울이며'를 만들었다는 썰이 있지만 좀 다른 스타일이죠. '귀를 기울이면'과 '바다가 들린다'를 보면 더더욱 미야자키는 '바다가 들린다'를 만들 순 없다는 확신이 듭니다. 그냥 그의 스타일이 아니에요.


- 1993년 개봉작으로 거의 당시 시대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와이로 가는 고등학교 수학여행, 여기저기서 긁어 모은 돈이라곤 해도 고등학생이 갑자기 비행기 타고 도쿄 가는 것 등은 그게 충분히 현실적으로 된 고도성장기 말기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죠.


- 고치 시내는 물론 도쿄까지 실제 모습들을 로케이션 헌팅을 활용해 고스란히 옮겨 왔습니다. 사진을 바탕으로 배경을 그대로 옮겨오는 것의 꽤 초기적 시도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도 관찰과 참조는 하되 배경 자체는 그걸 바탕으로 한 가공이 많은 미야자키 스타일과 차이가 있죠. 판타지성이 거의 제로라는 점(청춘판타지 말고)은 타카하타가 만들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 물론 그 경우엔 이렇게 달달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말이죠.


- 인체 비례 같은 건 사실적이면서도 적당한 생략과 기호화된 귀여움이 남는 그림을 하고 있습니다. 히로인 리카코는 전형적인 장발에 청순한 외모-를 하고 있는데, 배경이 고치라는 엄청 구석진 곳이고(현청 소재지긴 하지만...) 도쿄 전학생이라 성격은 도도하고 까칠하게 나옵니다.

문무겸비, 마음의 부족한 점 때문에 제 멋대로 군다는 점 등을 생각하면 스즈미야 하루히의 원형이라고 해도 될 거 같은데, 그래도 이상한데 흥미 가진 괴짜는 아닙니다. 솔직히 이런 성격이라도 좋다고 할 사람은 널릴 거라 생각하는데 작중 묘사도 그렇고 일본에선 이런 타입은 예쁘거나 말거나 고립되는 분위기인 거 같네요. 지역 사회와 관습에 녹아든다는 문제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히로시랑 쿙도 포지션이 비슷하긴 하네요.


- 그 시절 좋아했던 여자애에 대한 추억 이야기는 동아시아에서 꽤 보편적으로 사랑 받는 거 같은데(사실 관음증적 측면이 있어서 크리피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만), 영화들도 좀 있죠. 타이완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도 좋아했던 영화네요. 물론 그냥 짝사랑으로 끝나든지, 아니면 정말 사귀든지이지 둘이 정말 호감이 있었는데 그걸 제대로 인식하거나 전하지 못 하고 끝났다는 식(젊은 혈기나 치기에 제대로 풀어나가지 못 해서 틀어지는 거 말고)의 추억담이 되는 건 너무 달달한 이야기긴 합니다만...

리카코를 두고 히로시와 마츠노의 우정이 어그러지지도 않고, 연애 감정이라 할 만한 것에 도달하지도 않고,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히거나 하는 일도 없습니다. 제멋대로인 리카코와 휘둘리거나 적당히 맞춰주는 히로시, 거기에 친구 마츠노가 약간 끼여있을 뿐이죠. 로맨스라고 하기에는 확실히 너무 싱거울까요. 겨우 졸업한지 반년 만에 다들 어른이 되서 추억담처럼 얘기를 나누는 게 웃기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빠르게 흘러가는 일이죠.

애니메이션에서는 리카코와 재회하고 잘 될 거 같은 느낌인데 원작소설은 속편이 나왔고 거기서는 히로시와 얽힌 다른 여자 선배에 더 복잡해진 리카코의 가정문제가 화두가 된다고. 보질 않아서 결말은 모릅니다만 뭐 잘 되지 않을까요. 추억담이 시작조차 못 한 얘기고 호감을 확신한 걸로 끝나는 이야기니까요. 오히려 고교시절에 사귀었다거나 그런 거라면 헤어지는 걸로 끝나는 이야기가 어울릴 거 같지만요.



- 제일 기억에 남는 장면은 고치 공항에서의 째려보는 눈+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생리가 엄청 아프다고 말하는 장면이었네요. 표정, 생리 막말, 문무겸비에 까칠함 같은 거 생각하니 아스카의 원조란 생각도 듭니다.


- 동창회에서 유미가 리카코인 줄 알았습니다. 사실 제 취향은 리카코보다는 시미즈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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