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by eggry


 칸느 영화제 각본상 수상이고 지인들 사이에 나름 트렌디해서 마침 상영관 좋은데 걸렸길래 봤습니다. 영통 MX인데, 블록버스터가 아닌, 예술주의 영화가 걸리는 걸 보기는 쉽지 않죠. 사실 그냥 큰 스크린과 조금이나마 나은 사운드 정도만 기대하고 갔는데 생각보다 기술적인 면이 상당히 중요한 영화였습니다. MX관에서 보길 아주 잘 했다고 생각하고, 이런 장르에서도 AV가 결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걸 다시 확인했습니다.

 영화 플롯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합니다. 18세기, 프랑스 귀족 아가씨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한 화가가 초대됩니다. 아가씨는 이탈리아로 정략 결혼으로 팔려갈 운명이기 때문에 초상화 포즈 잡기를 싫어합니다. 초상화는 중매에 쓰이는 물건이기에 초상화가 없으면 결혼도 이뤄지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화가는 화가라는 걸 숨긴 채 대신 갇혀 지내서 외롭고 가시 돋힌 아가씨의 산책친구라는 명목으로 관찰하면서 초상화를 그리게 됩니다.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도 단순히 플롯 요약만 하자면 심플하기 그지 없습니다. 결국 둘은 애정관계가 되지만, 화가에게는 일이, 아가씨에게는 정략결혼이라는 정해진 결과(작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분적으로, 시대적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이죠. 그런 시대에도 이런 숨은 동성 간의 애정이 존재했을 거라는 건 두말할 것도 없지만요. 실제로는 발각될 경우엔 상당히 가혹한 처사가 따랐겠지만, 영화에서는 다행히 그쪽의 스릴은 없습니다.

 플롯 자체만 본다면 흔하디 흔한 한순간의 꿈 같은 이야기 얘기입니다. 시대의 가치관 같은 걸 보면 일본의 19세기~20세기 초 백합문학의 등장과도 유사성이 있다는 건 재미있는 부분이긴 합니다. 대충 100년 정도 차이를 두고 사회적으로 비슷한 면이 있다는 얘기가 되겠죠. 여성의 동성애는 존재는 하나 노골적이거나 인정받을 수 없고 숨겨야 되는 것, 가려지거나 덧없게 되는 것 같은 식으로 묘사된 것 말이죠.

 영화의 플롯은 단순하지만 그 전달은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시간을 두 인물의 사소한 행동, 표정, 대사에 의한 밀당(!)이나 긴장감에 들이고 있습니다. 칸느 각본상에서 알 수 있듯 대사와 연기는 신중하게 고려되어 짜여지고 배치되었고, 연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배경과 연출들도 역시 마찬가지죠.

 칸느 각본상을 받은 프랑스 영화, 멜로 드라마 장르라고 하면 하이테크와는 별다른 인연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위치에 있는 영화들은 헐리우드와 비교도 안 될 만큼 열악한 장비, 환경에서 창작자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질 거라는 선입견이 있죠. 하지만 기술은 확실히 저렴해지고 있고, 또 이런 영화도 분명히 기술의 득을 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장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무려 7K로 촬영되었고(헐리우드에서도 6K 이상은 보기 어렵죠), 후반작업도 4K(블록버스터도 아직 2.5K가 주류이고 4K는 극히 드문 상황입니다)로써 오늘날 영사환경에서 높은 스펙을 만족합니다. 비록 MX관이라도 애트모스 믹싱은 아니긴 합니다만, 두드러지는 스코어나 서라운드 상황은 없지만 사소한 효과음들로 디테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볼거리가 있는, 예산이 풍성한 영화는 절대 아니지만 그럼에도 투자된 기술들은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미묘한 표현과 감정선으로 승부하기 때문에 그걸 디테일하게 묘사해줄 수 있는 영상과 소리는 더없이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됩니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 파도소리, 휘날리는 불꽃, 캔버스의 질감, 붓칠 소리, 밤과 모닥불의 음영, 흐르는 눈물, 그리고 땀(ㅋㅋㅋ)까지... 이것들을 고스란히 전해줄 해상력과 사운드가 없었다면 영화의 호소력은 감소되었을 것입니다. 나름대로 중상급이라 생각하는 제 OLED TV와 서라운드 시스템에서도 감흥이 크게 떨어질 거란 걸 보면서 직감했습니다.

 딱히 이 영화가 세기의 명작으로 기억되거나 할 거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기에는 너무 지엽적인 면이 있죠. 하지만 특정 장르에서, 특정 관객층에게, 특정 분야에서, 한때의 떠올릴 기억으로 남기에는 충분할 듯 합니다. 극히 강렬한 제목과 그 제목의 원인이 되는 그림에 비해서 정작 문제의 그림은 발단 정도일 뿐 작중에서 역할이 거의 없다는 것만이 약간은 의외의 부분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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