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터미네이터란 당신에게 어떤 영화입니까? T2의 막대한 인기와 팬층을 생각하면 아마도 운명론에 대한 거대한 맞섬과 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비교적 드문 층에 속할, T3의 어찌할 모를 거대한 힘 앞에 그래도 일어서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좋아하시나요?(사실 제가 약간 그렇습니다) 아니면 아주 변태적이게도 콜오브듀티: 샐베이션이나 대체 어디로 뻣어나갈 생각인지 짐작도 안 되는 제니시스인가요?
저에게 터미네이터는 언제나 T1입니다. 그리고 T1은 아주 단순하고 원초적인 추격 스릴러죠. 거의 포르노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스토리, 설정이랄 게 거의 없습니다. 메시지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저 쫒는 자와 쫒기는 자의 간담서린 사투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터미네이터라 함은 곧 좋은 추격 스릴을 선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T3는 미진하긴 해도 아예 버리지는 않았지만 '샐베이션'이나 '제니시스'는 분명히 엇나갔다고 할 수 있죠.
'터미네이터: 다크페이트'는 혹평하는 평론에 비해 의외로 괜찮은 액션 스릴러입니다. 심지어 괜찮은 터미네이터이기까지 합니다. 추격물이란 관점에서 말이죠. 확실히 제임스 카메론은-물론 감독은 팀 밀러입니다만, 솔직히 다들 얼굴마담이란 건 인정하겠지요- 액션에 있어서 만큼은 T2 이후 세 작품과는 궤를 달리하는 재주를 갖고 있습니다. 사실 조여오는 상황전개라는 측면에선 T1, T2와 놀라울 만큼 흡사합니다. 도륙당하는 경찰, 대피한 플랜트에서의 결전 등 탬플릿이 고스란히 살아 있습니다.
액션에서 T1, T2의 데자뷔가 느껴지는 한편으로 '다크페이트'는 놀라울 만큼 시리즈의 소재 섞어찌개이기도 합니다. 터미네이터의 스펙이나 기능, 팀의 구성, 대립구도 등은 적잖이 T3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실 미래전쟁의 설정 측면에서도 T3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순 없겠죠.
제임스 카메론은 T2 이후 다른 터미네이터들을 다 무시한 속편을 만들기로 했는데, 정작 T3의 그림자도 느껴지는 것까지 생각하면 이 영화는 그냥 제임스 카메론이 리메이크한 T3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카메론 본인의 입김이 들어간 뉴! T3는 분명히 T3보다는 더 터미네이터 다운 면모를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과연 T1에 애초에 속편이 필요하기는 했냐는 질문 말입니다. T1은 포르노였습니다. 폭발하는 마초이즘, 폭력, 긴장, 스릴의 포르노 말입니다. 그리고 포르노에 필요 없는 건 속편과 스토리입니다.
시간여행이란 소재 덕분에 늘어지면 늘어질 수록 더 구차해지기만 하는 점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카메론이 T2를 만들면서 고민을 많이 한 건 분명합니다. 솔직히 스릴러 관점에서 T2는 1억 달러와 최신 CG 기술을 갖추고서도 T1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래 보이게 눈속임 할 정도는 됐지만요. 그래서 끌어들인 게 T1에는 없었던 스토리성, 운명이라는 무게감입니다.
이게 스릴러의 면모보다는 대중에게 더 공감되었다고 해야겠습니다. 사실 포르노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그걸 명작이라고 꼽고 싶은 사람은 적을 것입니다. 더 멋져 보이는, 그럴싸한 주제의식을 가진 물건이 옆에 있다면 더욱 말이죠. 하지만 T2는 T1의 본질, 속편이 필요 없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이겨내 보이려는 필사적인 노력의 결실일 따름입니다. 가상하기는 하나, 음, 거기까지입니다.
터미네이터를 만들려는 시도는 T2를 만드는 카메론과 같은 문제를 계속 부딧칠 수 밖에 없습니다. 카메론조차 그걸 극복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크페이트'를 보면 여전히 그러합니다. 카메론이 거의 30년을 걸려 만든 소위 아버지의 적자는 여전히 필요하지도 않은 답변입니다. 애초에 T1의 속편이 필요하지 않으며, 속편이 더 나을 수도 없는 구조에서의 또다른 가상한 몸부림입니다.
운명론을 처음 거론한 게 카메론 본인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 얘기는 벗어날 순 없습니다. T3보다 터미네이터적 포르노가 더 강해진 만큼, T2를 무시해버릴 순 없기에 운명론 얘기도 그보다는 더 강해집니다. 사실 '다크페이트'의 운명론은 T2와 T3의 키메라라고 생각합니다만, T2의 지위를 너무 힘빠지게 만들지는 않으려고 조금 더 신경쓰긴 했습니다. 그래도 태생적 한계를 넘을 수는 없습니다. 새로운 걸 제시하지도 못 하고, 심지어 손발이 오글거리기까지 합니다.
호오의 정도는 달라도 답은 언제나 같습니다. 새 터미네이터는 필요하지 않았고, 새로운 것을 주지도 못 하며, 뒤가 기대되게 하지도 않습니다. '다크페이트'가 논-카메론 터미네이터와 차별화되는 건 오로지 T1, T2 못지 않은 추격액션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즐거웠다는 것 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심입니다. 저에게 이건 T1 이외의 터미네이터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이것만큼은 전 T2보다도 나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원초적 질문에서 눈을 돌리긴 어렵습니다. T1이 있는데 왜 다른 터미네이터가 필요한가? 어쩌면 터미네이터가 아니었다면 그냥 좋은 기억으로만 남을 수도 있었을 영화가 터미네이터란 이름이 붙음으로써 또하나의 좌절로만 남는 건 아닐까? 터미네이터가 아니었다면 터미네이터 짝퉁으로만 남아 폄하 당했을까? 그 미래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즐거웠음에도 저의 오랜 스탠스를 바꾸지는 못 할 건 확실해 보입니다. 터미네이터의 속편은 애초에 없어야 한다는 것 말이죠.
ps.솔직히 적지 않은 부분을 T3의 아이디어를 빼다가 새로 요리해서 쓰고 있는데, 잘 요리하긴 했지만 자기가 만들지 않은 터미네이터를 무시하던 거 생각하면 영감님 참 뻔뻔하기도 하단 생각이 드네요.
ps2.세계관적으로는 굴리기에 따라선 끝없이 우려먹기도 되게 만들어 버렸는데, 그냥 스토리 별로 없는 "터미네이터 헌터" 시리즈나 만들면 어떨까 하네요.
태그 : 터미네이터다크페이트, 제임스카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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