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 2019 러시아 GP 결승 by eggry


 스파/몬자의 우승 이후 경기들은 힘겨울 거라 생각했지만 싱가포르에서 예상 외의 경쟁력을 보여주더니 러시아에서도 확실한 페이스 우세를 보인 페라리. 원래 여태껏 메르세데스만 이겨온 파워트랙이기도 해서, 페라리의 강점 및 보완된 약점을 생각하면 잘 맞을 트랙이었습니다. 개최 이래 메르세데스만 이긴 트랙에서 과연 기록이 깨질 것인가! 물론 안 깨졌습니다...

 이번 경기 최고의 화두는 페라리의 팀오더일 듯 합니다. 사실 스타트 할 때 르클레르가 해밀턴의 슬립스트림 이용을 저지하는 대신 베텔에게 이점을 주는 식으로 나갔고 그게 그냥 개인적인 전술일 거라 생각했는데 머지 않아 무전으로 팀이 사전에 협의한 것이란 게 드러났습니다. 턴 1이 사실상 코너가 아니기 때문에 턴 2까지 긴 직선이 이어지는 특성 상 스타트 슬립스트림을 이용해 해밀턴이 르클레를 잡을 가능성이 있어서 나온 대처였죠.

 문제는 그 합의 내용이 일단 스타트에서 해밀턴을 저지하고 나면 베텔과 르클레르가 순위를 다시 바꾼다는, 그러니까 혹여 베텔이 1위가 됐다면 르클레르에게 1위를 넘겨준다는 내용이었지만 베텔이 그걸 듣지 않기로 한 겁니다. 이 사태를 보고서 근래 팬이라면 '멀티 21'이 생각났을테고 역사책을 보았다면 질 빌르너브와 디디에르 피로니의 비극이 생각나겠죠. 팀이 계획한 바를 드라이버가 안 따르는 바람에 문제가 된 것 말입니다. 심지어 빌르너브와 피로니의 경우엔 빌르너브가 트랙에서 죽어서야 끝났습니다;

 일단 전술적으로 이해가 되긴 하나, 팀오더와 드라이버 관리란 측면에서는 나이브하기 짝이 없는 수작이었다고 봅니다. 드라이버가 팀의 명령에 절대복종할 정도로 권력 차이가 있다면 모를까, 상대는 4회 챔피언 베텔이고 심지어 이전 팀에서 팀오더를 무시하고 자신의 퍼포먼스와 인기를 무기로 팀을 사실상 굴복시킨 드라이버입니다. 이번에 일어난 일도 베텔이 고장으로 레이스를 마치지 못 했다는 걸 제외하면 '멀티 21'의 무력시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더 빠르니까 앞에 있는 게 당연하다는 거 말이죠.

 베텔은 선두에서 충분한 페이스를 보여서 자기가 더 빠른 드라이버란 걸 보여줌으로써 팀의 입을 막게 할 생각이었는데(멀티 21 때처럼) 이번엔 그렇게 순탄하게 되진 않았습니다. 고의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르클레르의 언더컷 후 베텔의 피트인은 좀 느렸고 결국 르클레르 뒤에 나오게 됐습니다. 이때 베텔의 퍼포먼스가 진짜 트랙에서 르클레르를 잡을 정도인지 아닌지 시험해볼 수 있을 기회였으나(그랬으면 페라리피트월은 더 곤란한 입장이 됐겠죠;) MGU-K 문제로 리타이어 하면서 불발로 끝났습니다.

 과연 사후평가에서 페라리가 베텔의 행동에 대해 엄정 조치를 할지, 아니면 어차피 리타이어 했기 때문에 그냥 미봉으로 덮어둘지는 모르겠습니다. 베텔이 그대로 이겨버려도 팀과 드라이버의 권력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안그래도 지난 경기에서 베텔을 보호하기 위한 전략이 르클레르의 우승을 앗아갔다는 것 때문에(충분히 이해되는 상황이라 해도) 분위기가 이상했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면 베텔의 폭권이라고 해도 될 상황이고 르클레르가 가만 있을 분위기는 아니죠. 하지만 리타이어로 끝났다고 그냥 어영부영 넘어간다면 비슷한 일은 언젠가 또 생길 겁니다. 그때 쩔쩔매는 것보단 지금 확실히 하는 게 좋겠죠.

 물론 저는 애초에 페라리의 생각 자체가 나이브했고 멍청했다는 쪽이긴 합니다. 순위 변경 같은 생각은 애초에 기대도 말았어야 합니다. 하지만 전술 자체는 논리적이긴 하며, 그런 식으로 운영하고 싶다면 누가 알파인지 확실히 해야할 거라고 봅니다. 페라리 성격 상 절대 개입하지 않고 냅두겠다는 식으로 갈 거라곤 기대하지 않지만, 하려면 제대로 좀...

 문제는 그럼 필연적으로 한 드라이버가 넘버원 지위를 확고히 하게 될 것인데 지금 분위기론 베텔보단 르클레르가 더 팀 내나 팬의 상승세를 타고 있기 때문에 으흠... 과연 이번 사건이 페라리 내분의 전환점이 될지 궁금합니다. 베텔로썬 올 시즌 팀 내 지위를 강화할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초조한 맘에 너무 과격한 방법을 쓴 게 될지도.

 뭐 페라리 리드긴 했어도 메르세데스 레이스 페이스도 나쁘지는 않아서, 최소 앞에 있으면 방어할 정도는 된다는 걸 보타스가 보여줬습니다. 베텔의 리타이어 후 공짜 피트스탑을 먹은 해밀턴이 리드로 나왔는데, 결과론적이지만 르클레르는 그냥 미디엄으로 버티는 게 나았을 듯 싶죠. 그럼 2위는 했을테니까요.

 페이스 우위가 있으니 새 타이어로 보타스 잡고 해밀턴까지 노려보겠단 생각이었지만 파워트랙이면서도 추월이 극히 어려운 소치인지라 보타스가 르클레르 막기도 그렇게 어렵진 않았습니다. 이건 결과적으론 오판이지만 공격적으로 나갔다는 점에서는 뭐 그렇게 나쁜 판단은 아니었다 생각하고 싶습니다.

 공짜 피트스탑으로 이득을 본 드라이버들을 제외하면 맥라렌이 중위권에서 안정적인 퍼포먼스와 성적을 냈습니다. 레드불은 뭐 거의 무풍지대에서 5, 6위를 먹을 참이었는데 페라리 삽질과 베텔의 리타이어로 4,5위까지 먹었네요.

 여튼 페라리의 삽질과 베텔의 불운이 겹치면서 오랜만에 원투 했다고 좋아하던 페라리는 한 경기만에 원투여야 할 경기를 메르세데스 원투로 바꿔놓았습니다. 개최 이래 메르세데스 전승 기록도 이어가게 됐고 WDC와 WCC 격차를 벌린 건 말할 것도 없죠.

 남은 경기를 전력투구로 몰아붙여야 WDC 2위라도 노려볼까 말까인데 경쟁력 있는 트랙에서 이렇게 자기 발을 쏘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니 너무 기대는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냥 이 머신 경쟁력을 말아먹지 말고 내년에도 계속 이어가서 시즌 시작부터 우승 경쟁을 할 수 있기나 바래야 할 듯. 페라리 경쟁력이 좋아졌긴 하지만 스즈카에선 지난 경기들보단 페라리 우위가 사라지거나 메르세데스의 근소한 리드를 예상합니다.



덧글

  • leo 2019/09/29 22:35 # 삭제 답글

    몬자 퀄리에서 르클레가 베텔의 토잉을 의도적으로 끌어주지 않은게 문제가 된걸로 알고 있는데
    이번에 베텔인가...(사실 르클레나 베텔이나 만만치 않으니...)

    아니 그보다 이런 식의 작전을 생각하는게 페라리의 어떤 대가리인가...?
  • eggry 2019/09/29 22:35 #

    드라이버들이 순순히 듣지도 않을 작전을 생각해서 반항으로 개판되고 있는 페라리
  • ㅇㅇ 2019/09/30 10:44 # 삭제 답글

    로스버그와 해밀턴을 컨트롤해낸 토토가 새삼 대단해보네요 ㅎㅎ
    (둘이 치고박고했지만 그렇다고 팀원들이 분열되는 모습은 없었죠)

    메르세데스는 독일 GP이후로 그렇다할 업데이트가 없습니다
    그러니깐 매 서킷마다 맞춤형 파츠로 최적화를 하던 모습이 지금 현재 보이지 않습니다
    로스버그 말로는 사실상 WDC WCC우승이 기정사실인 상황에서 개발인력을 일치감치 20,21년도 차량개발로 돌렸다고 합니다 르클레르는 아직 경험부족으로 셋업잡는게 롱런에서 발목잡는듯하구요 숏런에선 리어를 슬립시키면서 기록단축하는게 가능할진 몰라도 롱런에선 타이어만 소모시키는 꼴이니 베텔보다 레이스 페이스가 부족했고 나중에 경기후반 패랩경쟁에서 해밀턴에게 패배한것도 같은 이유라고 봅니다 리어그립부족이나 나쁜연비가 페라리의 최대약점인데 베텔은 셋업이나 드라이빙 스타일상 그나마 르클레보다 롱런이 나은것이죠 메르세데스는 추격할때 시종일관 경기내내 1초이내로 추격하는게 가능하지만 페라리는 타이어관리나 연료관리로 그게 안됩니다 페라리는 출력을 조금 높여쓰면 반드시 퓰세이빙 모드를 실행해야하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죠 (캐나다에서 베텔과 해밀턴 추격전에서도 나타남)
  • eggry 2019/09/30 11:15 #

    지금 분위기 보면 페라리가 폴은 좀 더 먹을 듯도 한데 결승은 그렇게까지 기대가… 예선만 잘 하던 윌리엄스-BMW 처럼 될지도
  • ㅇㅇ 2019/09/30 11:37 # 삭제 답글

    넷플릭스는 페라리한테 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네요 몇 쿨짜리 분량인지 ㄷㄷ;;;
  • eggry 2019/09/30 11:39 #

    모두가 독일 GP 폭망한 메르세데스가 하이라이트일 줄 알았으나… ㅋㅋㅋ
  • 바보이반 2019/09/30 18:49 # 답글

    퍼진 차에서 베텔이 의외로 홀가분?하게 뛰어내린 게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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