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라 원작 만화 완독 by eggry


 무지막지한 작화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으로 유명한 애니메이션은 진작에 접했지만, 만화는 오랫동안 제대로 접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어릴 때 해적판으로 초반을 본 적이 있긴 한데, 작화의 대단함이 워낙 강조되는 만화기도 해서, 제대로된 판본으로 즐기고 싶었죠. 국내엔 세미콜론에서 만화책으로썬 상당히 큰 판형에 좋은 종이로 근년에 출판했었습니다. 다만 원작자의 극구 주장으로 영문판 소스에 좌철 판본으로 나온 탓에 말이 많았죠. 좌철우철 문제보다 스캔하고 효과음 등을 다 새로 그려넣는 과정에서 영문판 소스가 일본 원판보다 해상력이 저하됐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렇다고 일본 원판을 구해볼 정도의 근성이나 여유는 없어서 어쩌다 포인트가 좀 생겼을 때 국내 정식 발매본을 샀습니다. 솔직히 일본 원판과 비교하지 않는다면 이 판본만 해도 해상력은 충분한 수준 이상이고 그림은 여전히 놀랍습니다. 이것만 보면 전혀 뭔가 부족하다거나 잘못 됐다는 느낌을 못 느낄 정도란 거죠. 한편으로 그럼 일본 원판은 얼마나 선명하다는 건가 싶기도 합니다만, 뭐 전체를 잃고 나니 단순히 그림 품질 만으로 일본판을 산다거나 할 생각 같은 건 별로 들지 않았습니다.

 뭐랄까,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가졌던 아키라에 대한 의문, 실험의 정체, 그리고 애니메이션에서 대충 정리해버린 마무리가 과연 더 많은 시간과 원작자의 의도에선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호기심은 유감스럽게도 별로 해소되지 못 했습니다. 사실 애니메이션이 엄청 잘라서 대충 마무리 해버리긴 했지만 결국 기승전결을 보면 원작도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냥 더 많은 등장인물에 더 많은 시간에 더 많은, 그렇지만 별로 의미는 없는 중간 사건이 들어가 있을 뿐이란 거죠. 아키라는 그냥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고, 테츠오는 결국 붕괴되며, 카네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테츠으으으으오오오오!!!" 만 외칩니다. 애니랑 별로 다를 거 없지요?

 사실 저도 네오도쿄의 붕괴나 테츠오의 폭주, 레이저포, 레이저 위성 같은 아이콘들은 많이 봤어도 실상 내용 같은 부분에서 아키라의 영향이라거나, 아키라가 모티브라거나 뭐 그런 얘기는 거의 못 들었단 말이죠. 그림이나 설정이 주는 충격성은 분명히 있는데 만화로써의 이야기성은 사실 심각하게 주의가 산만하고 말하고자 하는 바도 뭔지 알기 어렵습니다. 아니 말하려는 바가 있긴 한 건지도... 얘기는 거의 초능력자들의 폭주와 그것의 운에 가까운 수습으로 마무리 됩니다. 카네다와 테츠오의 관계도 음, 열등감이 뒤섞인 우정이란 부분은 깊게 들어갈 만한 점이 있다고 보는데 딱히 그런 감상적인 면은 둘 다 보여주지 않기도 하고요.

 오오토모 카츠히로가 작화 측면에서 이전의 데즈카 오사무로 대표되는 디포르메, 기호 중심에서 사실성이 강조되고 디테일을 그려넣은 그림으로 패러다임 쉬프트를 일으킨 입지적 존재라고 하는데, 그만큼 그림은 대단하긴 합니다. 사실 오늘날에도 이정도 그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되겠죠. 그런데 내용은 모르겠습니다. 아이디어는 정말 흘러 넘치고 자유분방했던 거 같아요. 하지만 그걸 이야기로 만드는 재주에 대해서는 모르겠네요. 적어도 아키라는 이야기로써는 형편없다는 말이 딱 맞겠습니다. 그야말로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갈 뿐입니다. 뭐 그게 작중에 말하는 우주의 거대한 흐름 같은 거랑 통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식으로 보기엔 저는 너무 단순해서...

 그때 그 시절 사람이 아니라 모르겠지만 아키라가 처음 나왔을 때 임팩트, 특히나 서양에서의 임팩트는 "와 뭐 이런 게 있지?" 하는 눈이 희둥그래지는 그림과 아이디어들의 충격효과가 더 컸던 거 같습니다. 쿨해서 미칠 지경인데 내용 그런 건 아무래도 좋고... 비슷한 시기에 공각기동대라거나 이것저것 원조 쿨 저팬 스러운 컨텐츠들이 쏟아지긴 했죠. 서양에서도 대중적 영향을 미친 건 이 시기라고 할 수 있고요.

 뭐 그래도 오랜 숙원이었던 진짜 아키라를 본 건 후련합니다. 그림은 정말 대단해서 그것만으로 소장가치가 있지 않나 싶기도 한데 한편으로 다시 보고 싶은 욕구는 하나도 안 생기는 내용이 참으로 안쓰럽습니다. 제가 보고 싶었던 건 화집이 아니라 만화였으니 말이죠.



덧글

  • dd 2019/03/11 23:51 # 삭제 답글

    시대의 반항아 폭주족 놈들이 싹 쓸린 세계에서 새 세상을 건설한다는 당시 시대 생각하면 굉장히 오소독스하게 전공투스런 내용이죠. 그렇게 까지 엉망인 내용은 아닙니다.
  • eggry 2019/03/12 07:11 #

    발상이 그렇다고 해서 전개와 전달을 잘 했다고는 죽어도 말 못 하니까요. 그냥 얻어 걸린 새 세상에 반공기인 카네다 생각하면... 코드는 넘치는데 그게 이야기로 뭉치진 못 한 듯
  • 은이 2019/03/12 08:47 # 답글

    전체적으로 이야기 전달이 좀 불친절한 편이었죠.
    한번보면 ?..??.. 하지만 몇번쯤 보면 아 이게 그렇구나.. 하고 보게 되는..
    다만 그 당시 시리어스한 분위기의 작품들이 쓸데없이(?) 세세한 설명보단
    독자가 알아서 느껴야 되는 분위기가 있다보니 그러려니 하게 되는거 같습니다 ㅎㅎ
    사실 캐릭터는 기억에 안남는데 멋진 오토바이!! 만은 쭉- 기억에 남던..
  • 뇌빠는사람 2019/03/12 17:56 # 답글

    내용 면에서는 그냥 노인Z 쪽이 백번 낫죠. 그것도 작화가 딸리는 것도 아니고. 아키라에 묻혀버린 아쉬운 케이스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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