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hen Porsche was a bigger F1 flop than Honda(Autosport)
근미래에 포르쉐가 F1으로 온다면 포뮬러1은 기꺼이 이들의 30년 만의 복귀를 반길 것이다. 하지만 혼다가 맥라렌과 재결합에 실패하기는 했지만, 포르쉐의 마지막 워크스 프로젝트보다는 나았다.
새 엔진 규정이 그들이 선호하는 방향으로 가준다면 포르쉐가 정확히 30년의 공백을 깨고 2021년 F1 그리드에 있을 확률은 제법 높다.
포르쉐가 F1에 복귀하게 된다면, 그건 슈투트가르트 자동차 메이커의 네번째 그랑프리 레이싱 참가가 된다. 풀 워크스였던 첫번째 시도는 소기의 성과는 있었다. 댄 거니는 1961년 챔피언십에서 3위를 했고, 철수하기 전 62년엔 폴과 우승을 한번 하였다.
그 후 20년 뒤, 포르쉐는 맥라렌의 엔진 파트너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TAG의 투자금으로 리브랜딩 된 V6 터보엔진을 달았으며, 맥라렌이 88년 혼다로 갈아타기 전 1984년에서 86년까지 3개의 타이틀을 획득했다.
반면 포르쉐의 1991년 세번째 시도는 경쟁력 없고 심각한 결함이 있는 V12와 함게 반 시즌도 가지 못 했으며, 너무 파국적이었기 때문에 30년이 지나서야 포르쉐가 그랑프리 레이싱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 정도였다.
3512 엔진은 F1이 터보에서 자연흡기로 복귀한 것에 대한 포르쉐의 엔진 마법사 한스 메츠거의 답변이었다. 포르쉐는 원래 이 엔진을 맥라렌이 써주길 바라고 들뜬 마음으로 87년 브리핑을 하였었다.
"포르쉐 엔지니어 중 한명이 서류가방을 갖고 왔습니다. 한장의 드로잉을 꺼냈는데, 그건 엔진의 전체적인 레이아웃이었죠." 전직 맥라렌 맨인 스티브 니콜스가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도면을 펼치기 시작하더니 게속 펼쳤습니다. 전 그걸 쳐다만 보았고, 내용을 보자 마자 "괴상하기도 해라" 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마치 우리의 작은 V6 엔진 2개를 붙여놓은 것 같았습니다."

"상당히 넓었고, 높았고, 그리고 기이이일었습니다. 그리고 기어 드라이브는 그들이 V6 2개를 붙여놓은 사이에 올라와 있어서, 샤프트가 V를 통과해서 뻗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기어박스도 거기 연결되기 위해 높아져야 했습니다. 전 미팅을 끝내고 나와 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혼다와 계약해요.' 전 그 엔진에 미래가 없어 보였습니다..."
포르쉐는 동의하지 않았고, 이후 2년여를 들여서 새로운 파트너, 그리고 F1 프로젝트에 투자할 돈이 있는 사람을 찾아 다녔다. 전체적인 책임을 가진 사람은 울리히 베츠로, 당시 포르쉐의 R&D 수석 부사장이었다.
"한스 메츠거는 F1 엔진 디자인에 있어 "교황들" 중 하나였습니다." 베츠가 떠올렸다. "전 그가 F1에 쓸 엔진에 대한 훌륭한 아이디어가 있다고 말하자 마자 간단히 그의 노하우와 재능, 능력을 믿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돈을 찾기로 했는데, 당시의 포르쉐는 지금처럼 수익성이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해나갈 돈이 없었죠."
톱 팀들은 이미 엔진계약이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작은 팀에 투자하는 부자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1989년 오닉스 팀을 새로 만들어낸 장-피에르 반 로셈이었다. 그는 포르쉐와 거의 계약할 뻔 했지만, 바이자흐에서의 불편한 미팅 후 계약을 포기했다.
베츠는 대신 재키 올리버에게 접근했는데, 부차적으로 그는 917 스포츠카 시대에 포르쉐의 팩토리 드라이버이기도 했다. 그는 최근 애로우즈 팀을 일본 기업가 오오하시 와타루에게 팔아넘겼지만, 풋워크로 이름이 바뀐 뒤에도 아직 운영을 맡고 있었다.
"포르쉐는 자기들이 원하던 팀들과 얘기가 잘 되지 않자 저에게 접근했습니다." 올리버가 떠올렸다. "우리에겐 두가지 선택지가 있었죠. 하나는 신형 포드 HB V8이었고, 다른 하나는 포르쉐였습니다. 저는 오오하시에게 두가지 옵션에 대해 얘기했고, 그는 '포르쉐!' 라고 단번에 답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죠. '돈이 더 듭니다' '상관 없어요' 그의 눈에서 별이 튀어나오고 있었습니다."

베츠는 일본으로 날아갔다. 도중에 알래스카에서 그가 탄 비행기가 이륙할 때 랜딩기어가 맟가지는 미래를 암시하는 듯한 재난에서도 살아남았다. 1990년 2월 4일, 오오하시는 풋워크가 포르쉐 엔진을 내년부터 사용한다는 계약을 공식적으로 채결했다.
"첫 시즌인 1991년의 지급액은 4차례에 걸쳐 2000만 달러로, 1990년 6월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올리버가 말했다. "그리고 1992년엔 2300만, 1993년엔 2500만으로 늘릴 생각이었죠. 저는 일본에서 돈과 오오하시의 열의를 받고 돌아왔으며, 바이자흐로 가서 한스 메츠거의 실제 엔진을 보기도 전에 계약이 된 상태였습니다."
"독일에 가봐야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제가 볼 수 있었던 건 메츠거가 가능할 법하지 않은 계약에 명시된 일정을 맞추려고 부던히 애쓰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엔진은 완성에 전혀 가깝지 않았고, 다이노 테스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걸 보자 우리 새 오너 오오하시에게 검증된 것이 아닌 백지부터 시작하는 물건에 돈을 쓰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염려되기 시작한 올리버는 본래 계약에 '엔지니어링 목표'라는 별첨을 추가하도록 손을 썼다. 거기에는 기대성능에 대한 5가지 조건-전체 출력(750마력 이상), 출력곡선의 모양, 연비, 최대 중량(150Kg), 그리고 장래의 출력 개선목표-가 들어 잇었다.
포르쉐의 야심에는 훗날 962에 사용되는 첨단 PDK 트윈클러치 기어박스와 진보된 디퍼런셜을 이용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1990년이 지나가면서 포르쉐에서 더 많은 정보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올리버와 그의 치프 디자이너 앨런 젠킨스는 근본부터 문제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마침내 포르쉐 엔진을 넘겨받게 되었을 때, 무게는 충격적이었다. 계약에 명시된 150Kg보다 훨신 무거웠던 것이다.
3512가 10월, 오오하시의 홈 경기인 스즈카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공개되었을 때 다들 태연한 척 했다. 하지만 11월, 올리버의 부관 젠킨스가 메츠거에게 그의 우려를 전달하면서, 풋워크의 도움을 받아 1992년에 쓰일 2세대 엔진 개발을 바로 시작해야겠다고 완곡하게 전했다.
서문은 메츠거의 만족스럽지 않은 짧은 답변을 받았다. 이후 젠킨스는 브라리언 하트 팀으로부터 코스워스 DFR 엔진을 빌려다가 폴 리카르 테스트에서 포르쉐 엔지니어 앞에서 두 엔진의 무게를 재어 보였다.

1991년, 풋워크는 본래 로스 브런이 1989년 만들었던 A11C 섀시의 개량형으로 시즌을 시작하였다. 테스팅은 끔찍했다. 포르쉐 V12는 힘이 없었으며, 절망적일 정도로 신뢰성이 나빴고, 고질적인 오일 소모 문제가 따라다녔다. 드라이버 미첼 알보레토와 알렉스 가피는 곤란한 처지가 되었다. 알보레토는 어떻게든 피닉스에서 예선은 통과했지만, 결국 초반에 리타이어 했다.
"제가 엔지니어링 보스였기 때문에 제가 책임을 졌습니다." 베츠가 말했다. "한편으로 내가 한스 메츠거의 능력을 처음부터 조금이나마 의심했더라면, 그리고 '이 상태론 안돼'라고 말했더라면 싶기는 하지만, 과연 사람들이 믿기는 했을까요? 그는 영웅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비난하는 대신 보호했습니다."
새 FA12 섀시는 이몰라에 준비되었지만, 알보레토가 테스팅 중 프론트윙이 부서지면서 생긴 큰 사고는 상황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가피는 모나코의 연습에서 충돌했고, 사랑받지 못하는 엔진이 뒤가 깨지면서 드러났다.
알보레토와 가피를 대신하게 된 스테판 요한슨은 캐나다와 멕시코에서 두번 더 고생하게 되었는데, 마지막 뱅크각 있는 코너에서 오일 문제가 특히 문제라는 게 증명되었다.
젠킨스는 볼프강 핫츠라는 엔지니어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해보려 했는데, 포르쉐 업무시간이 끝나고 경비원들을 피해서 리그를 이용하려고 했다. 수십년 뒤, 핫츠는 폭스바겐의 배기가스 스캔들에 깊게 관여하게 되었다.
포르쉐의 F1 프로젝트는 풋워크가 구형 A11B에 DFR 엔진을 달고 테스트를 하고 즉시 종국을 맞이하였다. 두 조합이 포르쉐와 신형 섀시보다 상당히 빨랐던 것이다.
"그건 포르쉐를 욕보이기 위한 시범이었습니다. '보라고, 우린 이것 땜에 곤란에 처했어' 라고 말이죠." 올리버가 말햇다. "되돌아보면 조금 과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포르쉐가 고진감래하고 다시 잘 해보기를 바랬지만,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더군요.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가 없어 보였습니다."

포르쉐는 심지어 오사카로 사람을 보네 오오하시를 만나 그에게 팀이 문제라고 말하면서, 돈과 엔진을 갖고 조던으로 갈 수도 있다고 시사하기까지 했다. 오오하시는 자신의 직원들에게 연락했고, 올리버에게 대화에 대해 말했으며 올리버로 하여금 포르쉐 경영진에 "노 땡큐" 메시지를 전하게 했다. 풋워크/포르쉐 관계는 완전히 끝나버렸다.
"저는 바이자흐로 변호사와 함께 계약파기애 대해 논하러 갔습니다." 올리버가 말했다. "그리고 계약조건을 충족하지 못 했으므로, 엔진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지불 불이행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미팅은 잘 흘러가지 않았고 그들은 우리가 계약을 깨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풋워크와 계약은 저, 올리버 때문에 깨지는 거라고요."
1991년 남은 기간 동안 풋워크는 FA12 섀시에 DFR 엔진을 썼으며, 포르쉐 V12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포르쉐는 뒤늦게 3512가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 했다는 걸 인정했다고 올리버는 떠올렸다. "그 작은 추가조항이 오오하시의 돈을 살려냈고, 저도 파산에서 구해냈습니다. 그 5개의 조건은 하나도 달성되지 않았습니다."
젠킨스는 훗날 핫츠에게 듣기를, 포르쉐 엔진은 다이노에서 510마력 이상 나온 적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베츠가 메츠거가 관여하지 않은 1992년을 위한 새 엔진을 취소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부차적인 이야기였다.
"F1에 한번 더 해보느냐, 아니면 회사를 구해줄 993에 더 노력을 집중하느냐의 문제였습니다." 그가 떠올려다. "저에겐 911을 새로운 컨셉으로 대체한다는 과업이 있었습니다. VW가 비틀에서 골프로 간 것처럼 말입니다."
"포르쉐는 자신의 안위를 지켜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보통 그런 게 의사결정의 근원이죠. 993이 실패하는 것보다 F1이 실패하는 게 나았습니다. 993이 실패하면 포르쉐 자체가 죽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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