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널판타지7: 오럴 히스토리 (1) - FF7의 기원 by eggry


Final Fantasy 7: An oral history(Polygon)

파이널판타지7: 오럴 히스토리 (1) - FF7의 기원
파이널판타지7: 오럴 히스토리 (2) - 게임 개발
파이널판타지7: 오럴 히스토리 (3) - 해외 출시
파이널판타지7: 오럴 히스토리 (4) - FF7 출시 그 후 (1)
파이널판타지7: 오럴 히스토리 (5) - FF7 출시 그 후(2)
파이널판타지7: 오럴 히스토리 (6) - 에필로그

 스퀘어의 업계혁신적인 롤플레잉 게임의 탄생과 그 영향을 당시 그 사람들로부터 들어본다.

 오늘날, 그곳은 요코하마 히요시 구의 전철역에서 얼마 안 떨어진 도토루 커피샵 윗층에 있다.

 빌딩을 방문한다고 해도 이제 자사의 캐릭터가 루이비똥 모델을 하고 수백만장의 게임을 팔아치우는 회사의 흔적이나 역사를 기념할 만한 것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1983년 이 장소에서, 그의 아버지의 사무실 한켠에서 창립자 미야모토 마사후미는 스퀘어라고 불리는 게임제작 스튜디오를 시작했다.

 원래 스퀘어는 정식 등록된 회사가 아니었다. 그저 사람들이 왔다가 가는 방에 불과했다.

 일부는 초기 스퀘어가 가족기업이었다고 묘사하기도 한다. 초기 직원 중 한명인 카지타니 신이치로는 그저 미야모토와 친구였기 때문에 합류했으며, 이 젊은 스튜디오를 대학 동호회에 비유했다. 다른 초기 멤버인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게임을 만들었다.

 "우리는 스퀘어 일을 커리어가 아니라 취미로 여겼습니다." 오랜 스퀘어의 작곡가인 우에마츠 노부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좋아하는 걸 하고싶을 뿐이었죠. 봉급이나 생계, 혹은 '우리 회사가 어떻게 될까?' 같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직원들이 성장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2017년 현재, 30년도 더 전 스퀘어 본사였던 곳은 헤어살롱으로 바뀌었다.

 초기 몇번의 성공과 실패 후, 스퀘어는 파이널판타지 시리즈 롤플레잉 게임으로 히트를 쳤다. 덕분에 더 큰 사무실로 옮기게 됐다. 수백명을 고용했고, 포트폴리오를 만들게 됐다.

 "결국 스퀘어가 주식상장까지 가게 되었으며, 사카구치 씨와 다른 경영진들은 재정목표를 달성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하게 되었죠. 목표 판매량 말입니다." 우에마츠가 말했다.

 "그런 커다란 변화가 마침 파이널판타지7 시점에서 일어났습니다."

 파이널판타지7이 1997년 출시되었을 때, 스퀘어는 돈방석에 앉았다. FF7은 3D 그래픽 기슬울 개척했으며,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이 경쟁기종을 압도하도록 도왔고, 일본 RPG를 서양에서 정착시키면서 1100만장 이상을 팔았다. 많은 팬들에게, FF7이 스퀘어라는 회사를 정의하였다.

 당시 멤버들은 FF7을 퍼펙트스톰이라고 불렀다. 스퀘어가 아직 작은 회사처럼 행동하고 있었지만, 대기업의 자원을 갖고서 3D 그래픽 산업이 막 시작되려는 찰나에 게임업계 사상 가장 야심찬 프로젝트에 돈을 쏟아부을 의지가 있었던 때였다.

 "그때 이후로 그와 같은 흥분을 느낀 적이 없을 겁니다." 프로그래머 카와이 히로시가 말했다. "스퀘어 처음부터 그 모든 사람과 하드웨어, 기술을 하나로 합칠 자원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결과물이 나오기 전부터 우리가 역사를 만들고 있는 것 같았죠."

 파이널판타지7이 이제 20주년에 가까워져 가고, 주목받는 플레이스테이션4 리메이크가 개발 중인 때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기로 했다.

 지난 2년 간, 폴리곤은 오리지널 파이널판타지7에 참여했던 30명 이상의 사람들을 쫒아다니면서 그들에게 창작의 이야기를 물었다. 이하는 그들의 증언이며, 한 회사가 변모해가는 과정 또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돈, 정치, 그리고 경계까지 몰아붙인 재능도 말이다.


사카구치 히로노부: 스퀘어 저팬의 프류듀서 겸 수석 부사장


키타세 요시노리: 스퀘어 저팬의 디렉터


노무라 테츠야: 스퀘어 저팬의 캐릭터 및 배틀 비주얼 디렉터


하시모토 카즈유키: 스퀘어 저팬의 CG 슈퍼바이저


우에마츠 노부오: 스퀘어 저팬의 작곡가


아마노 요시타카: 프리랜서 이미지 일러스트레이터


노지마 카즈시게: 스퀘어 저팬의 시나리오 라이터


나오라 유스케: 스퀘어 저팬의 아트 디렉터


타케치 토모유키: 스퀘어의 사장 겸 CEO


카지타니 신이치로: 스퀘어 USA의 부사장

그 외 25명이 전하는 이야기




Final Fantasy 7: The Origins


파이널판타지의 아버지


파이널판타지 시리즈의 창시자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스퀘어의 첫 게임계 셀러브리티가 되었다. 많은 이들이 그를 스퀘어를 80년대 후반의 침체에서 구해낸 것 뿐만 아니라, 3D 그래픽, 온라인 플레이, 영화계 진출을 선도한 것을 치하한다. '파이널판타지: 스피릿 위딘' 영화를 마무리한 뒤, 그는 스퀘어를 떠나 미스트워커 스튜디오를 창립하였다.

 사카구치 히로노부가 없었다면 스퀘어는 지금 없을지도 모른다.

 1980년대 중반, 스퀘어가 창립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스퀘어는 여전히 게임업계에 설자리를 찾고 있었다. 몇가지 적당한 성공을 거둔 PC 타이틀을 내놓았지만, 닌텐도 패미컴이 일본에 출시되자(미국에선 닌텐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으로 나왔다.) 스퀘어는 이 새 하드웨어에 큰 도박을 걸기로 했다. 패미컴으로 게임을 쏟아부으면서 큰 성공을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 하였다. 팀은 돈에 쪼들렸으며 폐업을 걱정할 지경에 이르렀다.

 스퀘어의 첫 파이널판타지는 1987년 패미컴으로 출시되었으며, 이때부터 팔자가 바뀌기 시작했다. 정교한 스토리와 고품질 프로덕션 덕분에 파이널판타지 시리즈는 패미컴의 가장 성공적인 게임 중 하나가 되었으며, 후속기인 슈퍼패미컴으로도 이어졌다. 1980년대 후반, FF 시리즈는 스퀘어를 재정난에서 구해내었다. 90년대엔 스퀘어 직원들이 꼭 붙들고 같이 날아야 하는 로켓 수준이 되었다.

 FF의 창시자 사카구치에겐 이 시절이 전성기였다. 그는 스퀘어(일시적으로 당시엔 스퀘어소프트였던)의 수석부사장이 됨으로써 개발자 중 최고위직이되었으며, 업계 유명인이 되었다. 회고 인터뷰에서, 그는 당시 자신의 역할에 겸손하려 했지만, 다른 이들은 그가 쇼를 만들어내고 수백만 달러짜리 결정을 변덕스럽게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카키바라 모토노리(스퀘어의 무비 디렉터): 90년대 후반, 모든 게임 회사들은 돈이 많았습니다. 스퀘어는 특히 그랬죠. 그래서 스퀘어는 비용에 집착하기보단 품질을 우선시 했습니다. 그게 사카구치 씨가 일하는 방식이었죠. 그는 언제나 팀에 많은 걸 요구했고, 우리에게 빡빡한 스케쥴을 줬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력증원이나 최고의 하드웨어에 대한 요구도 들어주었죠. 이런 건 업계에서 매우 드문 여건입니다. 그는 언제나 큰 비전을 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걸 실현할 방법도 고민하였죠.

타케치 토모유키(스퀘어의 사장 겸 CEO): 그는 언제나 미래를 보았고 큰 그림을 그렸습니다. 현재 작업하는 것에 만족할 줄을 몰랐죠.

요시나리 타츠야(스퀘어 저팬의 프로그래머): 사카구치 씨를 신이라고 부르는 건 너무 나간 것 같지만,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슈퍼스타였죠.

히고 쿄코(스퀘어 US의 어시스턴트 마케터): 사람들이 그를 "킹(The King)" 이라고 부른 게 기억납니다. 그 앞에선 아니었지만요.

야나기하라 준이치(스퀘어 USA의 수석 부사장): 좋은 뜻에서 그는 킹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론 이메일 주소를 만드는데 그가 자기 본명을 쓰고 싶지 않아서 시작됐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킹이라고 쓰고 뒤에 숫자를 좀 붙였죠. 그러자 우리는 "그래 그럼 그를 킹이라고 부르자" 라고 했습니다.

마루야마 요시히로(스퀘어 US의 수석 부사장): 그래요, 그는 킹이었죠.(웃음) 사실 스퀘어소프트 일본 본사에서 그 없이는 대부분의 경영진 회의에서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사회에 게임이 언제 완성될지, 어떤 마케팅을 할지 말해줬죠. 그러니 그가 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모든 영업을 통제하고 있었으니까요.

사카구치 히로노부(스퀘어 저팬의 프로듀서, 수석 부사장, 스퀘어 USA의 회장 겸 CEO): 킹? 그게 스퀘어 US에서 온 거였나요? 그 사람들...(웃음) 제가 그렇게 불렸던 기억이 나는군요. 사실 실제 의미는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샴페인을 엄청 많이 마셨던 때가 있는데, 그래서 저는 "샴페인 킹" 이라는 닉네임을 얻었죠. 거기서 나온 겁니다. 제 일과는 연관 없는 의미였죠. 그리고 지금은 그때처럼 마시지 않습니다.

마루야마 요시히로: 때때로 그의 업무방법은 대단히 공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창의적 요소를 이해하면서도 경영적 문제도 알고 있었죠... 그래서 그는 개발팀의 핵심 멤버와 매우 밀접히 일했습니다. 스퀘어소프트의 경영진 누구도 그렇게 하지 못 했죠.

카와이 히로시(스퀘어 저팬의 캐릭터 프로그래머): 그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단히 통달했습니다. 어떤 면들은 진정 권모술수라고 할 만 했고, 다른 것들은 동기부여적인 의도가 더 강하기도 했죠.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걸 만들어내도록 만드는 법을 알았습니다.

요시나리 타츠야: 그가 독단적인 결정을 내렸다고 말하진 않겠지만, 큰 결정을 상당히 빠르고 쉽게 내리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의사결정이 당시의 영감에 기반한 것이라고 생각했죠. 뭔가 그의 머리를 내려친 뒤 그는 "좋아 이렇게 하자고" 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사카구치 히로노부: 내 방식이 다소 중구난방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겁니다. 어느날 아침 저는 직원에게 "이렇게 해" 라고 말하고서는 그가 결과물을 보여주면 제가 요구한 것인데도 꼭지가 돌아선 이렇게 말하곤 했던 거죠. "왜 이렇게 한 거야?!"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나곤 했습니다. 제 머리 속에서 생각이 늘 흘러다니면서 요동치고 바뀌었기 때문에 한 주제에 대해서 메일을 10번이나 보내곤 했습니다. 메일을 보내고 나서 생각이 바뀌어서 다시 보내고, 또 생각하고 그렇게 말이죠.

히고 쿄코: 사카구치 씨는 파이널판타지의 아버지죠. 그가 시리즈를 만들어냈어요. 저나 팀원들이 그의 창의성을 전적으로 신뢰하긴 쉬웠고, 그를 지지할 수 있었으며 그에 따라 우리 스스로도 정말 헌신하게 됐죠.

마루야마 요시히로: 사카구치 씨의 황금기는 그가 파이널판타지7을 개발하던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가 내린 대부분의 결정이 좋은 결실을 맺었죠.


파이널판타지7 제작의 첫 시도

 파이널판타지6에서 키타세 요시노리는 시리즈의 디렉터 자리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파이널판타지7에서도 같은 역할을 맡았다. 팀 멤버들은 키타세를 많은 유명 개발자들에 비해 침착하고 조용한 타입이라고 며사했으며, 그의 시네마틱 감각이 FF7의 CG 컷씬에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FF7이 출시 후에도 키타세는 스퀘어에 남아서 여러 파이널판타지 게임의 디렉팅과 프로듀싱을 했다. 2017년, 그는 파이널판타지7 리메이크의 프류듀서이다.

 90년대 초, 스퀘어는 일본에서 파이널판타지 시리즈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었으며, 안정된 성장 속에서 실험을 할 여유가 생겼다. 사카구치는 이 때를 일련의 야심찬 프로젝트들을 시도해볼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 중 하나는 드래곤퀘스트의 제작진과 DQ의 아티스트이자 드래곤볼의 작가와 협력한 게임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결과물이 크로노트리거라는 RPG였다.

 한편 닌텐도 하드웨어로 첫 파이널판타지를 낸지 6년 째 되던 때, 사카구치는 FF 시리즈에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스퀘어 팀 멤버인 키타세 요시노리나 노무라 테츠야가 FF 시리즈의 일상 업무에서 지휘봉을 잡게 되었으며, 사카구치는 더 높은 차원의 기획과 스토리 아이디어를 다루게 되었다. 키타세는 필름에 매료되어 있었으며, 게임과 영화의 스토리텔링의 유사성에 주목하고 있었다. 노무라는 아티스트로써 FF 시리즈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점점 더 많은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파이널판타지7이 다음 단계임은 분명했지만, 콘솔 하드웨어가 빠르게 진보하면서 스퀘어는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확신을 갖지 못 했다. 전작과 같이 2D 픽셀 아트를 고수하는 것이 안전한 방법이었지만, 친근한 하드웨어 파트너와 새로운 스타일을 도전해볼 수도 있었다. 또는 새 하드웨어 파트너와 3D 그래픽도 선택지였다. 아이디어가 모든 방향으로 넘쳐나고 있었고, 2년에 걸쳐서 스퀘어는 FF7을 만들 세가지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

 첫번째는 FF6의 속편을 슈퍼패미컴으로 2D로 내는 것이었다.

키타세 요시노리: 당시 일본 RPG가 결국 3D가 될지 아닐지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카구치 씨는 특히 픽셀 아트에 애착이 강했죠. 2D 스타일을 고수해야 하는지 많은 논의를 했습니다...FF6를 마무리한 뒤, 우리는 FF7(SFC용 2D 게임)의 작업을 시작했으며, 브레인스토밍과 기획 회의를 열었습니다.

사카구치 히로노부: 1994년? 잠깐, 뭐라고요? 키타세가 그렇게 말했나요? 아직 뭘 할지 확정짓지 못 했다고 했다고요? 잘 모르겠네요. 그 시절은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제 생각엔 당시 그의 생각을 그가 말한건지도 모르겠네요.

키타세 요시노리: FF6 제작에 대략 60명 가량이 참여했습니다. FF7(SFC용)의 사전제작을 시작할 당시, 그보다는 적은 수였죠. 대략 20~30명 정도였을 겁니다.

노무라 테츠야: 우리의 작업 속도는 대단히 느렸습니다. 몇달은 걸렸던 거 같군요.

키타세 요시노리: 2,3달 정도 걸렸죠.

노무라 테츠야: 초기에 우린 스토리를 어떻게 할지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결정된 게 하나도 없었죠...사카구치 씨가 쓴 초기 플롯은 뉴욕이 배경이었고, 어떤 조직이 마황로를 파괴하려는 내용이었습니다. 조 탐정(Detective Joe)라는 인물이 그들을 조사하고 있었죠. 다른 캐릭터들도 있었습니다. 마황로를 파괴하려는 조직원 중 하나는 클라우드의 프로토타입 같은 캐릭터였죠.

키타세 요시노리: 노무라 씨도 컨셉과 기확을 작성하지 않았던가요?

노무라 테츠야: 저도 했었죠.

키타세 요시노리: 하지만 당시 크로노트리거의 개발에 탄력이 붙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멤버들이 크로노트리거를 돕기 위해 옮겨야 했습니다...그래서 그 이상은 진척되지 못 했죠.

사카구치 히로노부: 그랬죠. 이제 기억나는군요. 우리 모두가 크로노트리거에 달라붙었던 때였습니다. 크로노트리거를 마들기 전, 우리는 FF7의 제작에 대해 얘기했습니다만 결국 크로노트리거 팀을 돕는데 전부 달라붙어야 했습니다. 이제 기억나는군요. 제가 FF7의 첫 시나리오를 썼는데, 최종판과는 다른 이야기였죠. 배경이 뉴욕이었는진 기억나지 않습니다. 뉴욕은 패러사이트 이브였던 것 같은데요. 조는 사실 제가 로스트 오디세이를 만들 때 주인공의 초기 이름으로 붙인 것이기도 합니다. 모르겠네요, 모든 정보가 뒤섞인 것 같아요.


2012년, 스퀘어는 "Final Fantasy 25th:Memorial Ultimata Vol.2"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파이널판타지 7,8,9의 개발비화를 담고 있다. 그 안에는 SFC로 제작되던 FF7 프로토타입의 모습과 다른 실험들도 담겨있다.


3D 그래픽의 초기 실험

 파이널판타지7의 기술의 핵심인물 중 하나인 하시모토 카즈유키는 컴퓨터 제조사 심볼릭스에서 3D 그래픽 경험을 가지고 95년 입사했다. 스퀘어에서 그는 새로운 그래픽 파이프라인을 구축하고 엔지니어들을 모집해서 FF6: The Interactive CG GAME이라는 테크데모를 제작했다. FF7을 마무리한 뒤, 그는 스퀘어 호눌룰루 스튜디오에서 비슷한 과정을 거쳐 "파이널판타지:스피릿 위딘" 영화 작업에 참여했다. 호눌룰루 스튜디오가 폐쇄될 때 하시모토는 스퀘어를 떠났다. 스퀘어 퇴사 후 그는 EA에 입사해 초기 PS3 하드웨어를 다루는 일을 도왔으며, 아바타 리얼리티라는 하와이 기반 스타트업의 사장이 되었다. 2012년 그는 엔비디아에 입사했다.

 슈퍼패미컴버전의 FF7 작업이 뒷전으로 미뤄진 뒤, 스퀘어는 FF 시리즈를 3D로 만드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94년, 스퀘어에게 3D는 새로운 것이었으며, 많은 직원들이 2D 게임 제작 밖에 해보지 않았다. 그래서 곧장 뛰어들기 보다는 작은 실험팀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3D 하드웨어의 명가 실리콘 그래픽스의 하이엔드 컴퓨터를 이용해, 스퀘어는 FF6을 3D로 만든다면 어떤 모습일지 보여주는 테크데모를 제작했다. 팀 멤버들은 이 데모가 실제로 언젠가 팔릴 물건이라기보다는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이라고 생각했다.

 3D 테크 데모를 만드는 작업은 세가, 닌텐도, 소니 같은 기업들과 함께 3D 게임 개발을 해본 경험이 있는 엔지니어 하시모토 카즈유키로부터 시작되었다.

사카구치 히로노부: FF7 이전에 우린 3D 그래픽을 해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좋은 친구인 하시모토 씨를 만나게 됐고, 그가 3D 비주얼을 만들 재능있는 인재들을 찾는 걸 도와주었죠. 그들에게도 게임 작업은 처음이었고, 우리에게는 3D 그래픽이 처음이었습니다.

하시모토 카즈유키(스퀘어 저팬의 CG 슈퍼바이저, 스퀘어 USA의 CTO 겸 수석 부사장): 당시 저는 다른 회사에서도 제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흥미가 없었죠. 사카구치 씨는 달랐습니다. 그에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뭔가 다른 게 있었죠. 그게 뭔진 몰랐지만 뭔가 다르게 느껴졌습니다...그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보는 재능이나 능력이 있었어요.

사카구치 히로노부: 닌텐도64와 플레이스테이션이 차세대 하드웨어가 될 거란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 하나로 개발하게 될 것이었죠. 패미컴에서 슈퍼패미컴으로 갈 때와 비슷한 세대교체였습니다. 우리의 첫 단계는 어느 시스템을 고를까가 아니라 구입한 실리콘 그래픽스 워크스테이션으로 어떤 걸 할 수 있는지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실리콘 그래픽스는 매우 비싼 기계였고, 우린 사람들에게 데모를 만들어 보여주었죠. "이게 3D 파이널판타지의 모습입니다." 라고요.

하시모토 카즈유키: 스퀘어는 차세대 닌텐도 머신으로 게임을 만들 계획을 했습니다. 하지만 개발킷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고 정확한 사양도 불명이었죠. 그래서 저는 표준적인 환경에서 우리가 무얼 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고 했습니다. 그러고서 최종 콘솔에 최적화 하자고 말이죠. 그래서 우린 시작부터 가장 강력한 환경에서 할 수 있었고, 더 자유도가 높았습니다. 3D로 가능한 게 뭔지 분석할 자유도 말이죠.

사카구치 히로노부: 당시 2D에서 3D로 전환은 대단히 큰 변화였습니다. 3D 배틀씬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기는 저로썬 상당히 어려웠죠.

하시모토 카즈유키: 스퀘어는 3D 그래픽 산업에 신인이었기 때문에, 실리콘 그래픽스는 우리에게 별로 관심을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FF6 3D 데모를 만든 뒤, LA에서 열리는 시그래프 컨퍼런스에 출품하려 했지만 본체를 가져갈 수 없었습니다. 너무 컸기 때문이죠. 우리는 실리콘 그래픽스 본사에서 본체를 빌리려고 했지만, 그들은 우리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실리콘 그래픽스에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임대를 도와달라고 했고, 다행히 데모를 위한 본체를 빌릴 수 있었습니다.



시그래프에서 FF6: The Interactive CG GAME를 선보인 뒤,
스퀘어는 그 영상을 녹화하여 1996년 도쿄 게임 쇼에서 디스크를 나눠주었다.

카와이 히로시: 제가 영어를 할 줄 아는 유일한 개발자였기 때문에, 부스에서 접객을 담당하게 되었고 시그래프에서 게임에 대해 설명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데모는 한번의 전투만 보여주었는데, 제법 재미있었던 기억이 나는군요...많은 사람들이 배틀에 이기기 위해 두세번 재시도했던 게 기억납니다.

사카구치 히로노부: 손님이 그렇게 많진 않았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화면에 심볼을 그림으로써 주문이나 소환수를 부릴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그래픽에는 흥미를 보였지만 게임 시스템에는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마이클 존스(실리콘 그래픽스의 엔지니어링 디렉터): 당시 데모의 인터페이스는 제스쳐 인터페이스였습니다. 조로의 Z 자를 그리면 그렇게 행동하는 식이었죠. 원을 그리면 다른 행동을 하고요. 이런 제스쳐들은 스토리텔링 게임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겐 먹혔지만, 마이크로소프트 시스템이나 다른 컴퓨터를 쓰는 이들은 이해하기 힘들어 했습니다. 대단히 과격하고 상상력을 요구했기 때문에 별로 합리적이진 않았지만 재미있긴 했습니다. 컴퓨터 회사가 핀볼 기계를 만들었다면 그들은 "푸시"나 "발사" 혹은 "클릭"이라고 붙은 버튼을 달았을 겁니다. 하지만 게임 디자이너라면 커다란 스프링을 만들고 그걸 당길 수 있게 만드는 거죠.



스퀘어가 1995년 FF6: The Interactive CG GAME의 스크린샷을 공개했을 때, 일부 잡지들은 이것이 닌텐도64(당시엔 "울트라 64"라고 불렸던)으로 나올 게임의 첫 모습이라고 보도했다. 물론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하시모토 카즈유키: 시그래프의 청중들은 그들이 보는 게 뭔지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많은 참가자들이 하이테크 엔지니어링이나 군사업계의 비즈니스 관계로 온 이들이었지만, 우리는 그저 놀기 위한 게임 데모를 보여줬으니까요. 사람들은 "오 신기한데" 라고 말했지만 그게 다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SGI의 마이클 존스가 방문한 게 기억납니다. 그는 우리가 자사 기술을 사용해서 들렀던 것이지만, 그는 우리에게 감명받아서 본사에서 그걸 시연하게 해달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SGI 본사에서 데모를 선보였습니다. 그는 그후 키홀의 사장이 됐죠. 키홀이 뭐냐고요? 구글에서 찾아보세요. 세상은 좁잖아요.

마이클 존스: 제가 그 데모에서 좋아했던 것은 기술적으로 진보되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비디오게임들과 달리 아니메처럼 움직임이 충실했다는 것입니다. 아니메 "아키라"에서 사내가 주먹을 쳐들면 뭔가 일어나죠. 당시 비디오게임은 그런 게 없었습니다. 이 데모는 "예술적으로 보이는 컴퓨터 게임을 만들어 영감을 주자" 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사카구치 히로노부: 당시 컴퓨터 그래픽에 대해 논할 때, 사람들은 리얼리스틱한 것을 보길 원했습니다. 실사 영상과 같이 놔둬도 차이를 알 수 없을 그런 걸요. 하지만 우리는 CG를 이용해 아니메 캐릭터를 묘사했습니다. 그때문에 사람들이 별 흥미가 없었던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우리가 지향하는 바였죠.

마이클 존스: 시그래프에는 미친 짓을 하는 고객들도 많았습니다. 원자로를 시뮬레이션 한 곳도 있었고, 스페이스셔틀 시뮬레이터도 있었죠. 그 모든 미치광이 같은 응용을 하면서 그들은 우리 컴퓨터를 사용했고, 저희 팀이 만든 소프트웨어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하드웨어가 게이머들이 사용하는 것과는 아득할 정도로 차이 나는 것이긴 했지만, 게임 개발자나 디자이너들에겐 PC나 다른 기기에서는 1년은 걸릴 듯한 코드를 인터렉티브하게 시뮬레이션 할 수 있게 해주었죠. 워크스테이션의 슈퍼파워를 이용해 이것저것 연습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게 스퀘어가 당시 한 것이었죠.




파이널판타지7 제작의 두번째 시도


 크로노트리거가 마무리돠고 파이널판타지 시그래프 테크데모가 진행되는 동안, 스퀘어는 SFC 버전이 폐기된 뒤 두번째 FF7 제작 시도를 시작했다. 스퀘어는 닌텐도의 오랜 우군이었고, 대부분의 게임이 닌텐도 시스템 독점으로 나왔기 때문에 스퀘어의 많은 이들도 닌텐도가 다음에 뭘 내놓든 간에 닌텐도64로 게임을 만들 거라고 생각했다.

 닌텐도는 심지어 닌텐도64 하드웨어를 위해 실리콘 그래픽스와 파트너십까지 맺고 있었으므로, 스퀘어의 시그래프 데모 경험은 닌텐도64를 위한 자연스러운 준비라고 여겨졌다.

 스퀘어는 3D 파이널판타지7이 닌텐도64으로 나온다면 어떨지 탐색하기 시작했다. 컨셉은 닌텐도64의 용량확장 주변기기인 DD를 활용하는 것까지 고려되었다. DD는 일본에만 출시되었고 결국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 했다. 스퀘어 팀원들은 긴 컷씬과 많은 양의 컨텐츠를 넣고 싶어했지만, 닌텐도64 카트리지의 적은 용량에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작업도 공개적으로 뭔가 보여줄 만한 수준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 했다.



2015년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익스피리언스 무대 행사 후, 파이널판타지7 디렉터 키타세 요시노리와
아티스트/작가 노무라 테츠야가 폴리곤의 샌프란시스코 사무실에서 농담을 하고 있다.

키타세 요시노리: "공식적으로" 닌텐도64로 개발했던 적은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닌텐도64로 실험해보는 수준이었죠.

카와이 히로시: 닌텐도는 우리에게 닌텐도64의 에뮬레이션 킷을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된 규모의 프로그램은 돌리질 못 했죠. SGI 오닉스(닌텐도64 에뮬레이션 용)이 얼마만한지 아십니까? 1.2*1.2m 테이블보다 약간 작은 정도입니다. 당시엔 아주 간단한 데모만 돌리는 수준이었고, 우리는 시그래프 데모에 사용했던 고해상도 모델을 옮긴 뒤 어떻게 돌아가나 보려고 했습니다. 또한 FF6 데모에는 없었던 레비아탄 소환수 3D 모델도 사용해보았죠.

키타세 요시노리: 우리는 무엇이 가능한가 보기 위해 데모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극소수의 사람만 참여했습니다. 몇명의 프로그래머와 더나섯명의 아티스트가 그래픽 작업을 했죠. 그 아티스트들은 지금은 잊혀졌지만, 그들이 처음 만든 캐릭터 모델은 (결국 최종 제품판에서 만나게 되는) 클라우드, 바렛, 레드 써틴이었습니다.

노무라 테츠야: 그 캐릭터들을 작업하고 초기 디자인을 손본 게 기억나는군요. 클라우드와 바렛은 키가 너무 작아서 좀 더 크게 만들었습니다. 그 세명이 우리가 제일 처음 만든 캐릭터였습니다.

키타세 요시노리: 우리의 작은 그룹은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었고, 점차 인원을 늘렸습니다.

노무라 테츠야: 모든 사람과 장비가 방 하나에 들어갈 정도였죠. 기억 납니다.

키타세 요시노리: 그렇습니다. 다른 직원들과 격리된 방 하나 였죠. 극소수만이 우리가 진행하는 일을 알았습니다. 아주 은밀했죠. 메인 데모 작업은 대략 한두달 쯤 걸렸을 겁니다.

노무라 테츠야: 정확한 시간은 말하기 힘듭니다. 스케쥴이란 게 없었거든요.

키타세 요시노리: 노무라 씨, 우리가 닌텐도64용 SGI 데모를 만들고 있을 때 당신이 처음 만든 게 베히모스 CG 모델인 게 기억나시나요?

노무라 테츠야: 그랬나요? 폴리곤으로요?

키타세 요시노리: 파이널판타지 신작 연구나 개발을 할 때면 우린 보통 베히모스를 테스트 모델로 삼았습니다. 닌텐도64 데모의 경우 베히모스에 2000 폴리곤이 들어갔죠.

노무라 테츠야: 전혀 기억이 안 나네요.

키타세 요시노리: 그래요? 하지만 당신이 만들었어요!(웃음) 어쨌든 우리는 2000 폴리곤 버전의 베히모스를 닌텐도64로 만들었지만 우리가 렌더링하고 움직여보자 프레임이 너무 낮았습니다. 베히모스를 충분히 묘사하기 위해선 2000 폴리곤이 필요했지만 하드웨어가 감당해내질 못 했죠. 그게 우리가 닌텐도를 선택할 경우의 문제점 중 하나였습니다.

카와이 히로시: 이 모든 작업은 닌텐도 스페이스월드를 위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코딩을 하고 있었는데 이 스페이스월드 데모의 리드 개발자였죠. 연말이 가까웠던 때였던 거 같습니다. 사카구치 씨가 넓은 층 가운데 모두를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가볍게 선언했죠. "우리는 더이상 닌텐도로 개발하지 않을 겁니다..." 결국 제가 한 모든 작업은 수포로 돌아갔죠.


닌텐도를 떠나 소니로 간 스퀘어

 슈퍼패미컴 시대에, 닌텐도는 일본 대형 서드파티 스튜디오를 휘어잡았다. 캡콤, 코나미, 스퀘어 같은 회사들은 닌텐도의 성공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세가 메가드라이브보다 닌텐도를 우선시 했다.

 닌텐도64와 플레이스테이션 출시가 다가오면서, 닌텐도의 통제력은 약화되고 있었다. 비록 소니는 게임산업에 실적이 없었지만 개발자들에 대한 적극성과 하드웨어는 많은 서드파티들이 참가하도록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스퀘어는 닌텐도를 버린 가장 큰 회사 중 하나였다. 1996년 초, 전체 라인업을 소니 하드웨어로 옮기겠다고 발표했으며, 파이널판타지7이 그 중핵이었다.

 그 세대가 끝날 즈음엔 거의 모든 메이저 서드파티가 소니에 합류해 있었다. 닌텐도64의 카트리지보다 플레이스테이션의 CD의 제조적 이점이 경제적으로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1990년, 시코쿠 은행에서 일하던 타케치 토모유키는 스퀘어에서 재정을 다루는 일도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는 스퀘어가 1994년 상장되는 것을 돕게 됐고, 1996년에는 완전히 이직하게 된다. 스퀘어가 FF7을 닌텐도로 만들지, 소니로 만들지 고민하고 있던 바로 그 때였다. 스퀘어의 사장이자 CEO로써, 그는 스퀘어의 PS 게임을 일본에서 소니가 퍼블리싱 하도록 협상하였고, 미국에선 스퀘어의 첫 6 타이틀을 소니가 퍼블리싱 하는 계약을 맺었다. 2000년, 그는 스퀘어의 회장이 되었으며 2001년에는 적자를 책임지고 사임했다. 스퀘어 이후 그는 AQ 인터랙티브라는 스튜디오의 사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여러 게임업계 기업들의 이사진에도 들어가 있다.

마루야먀 요시히로: 1995년 9월 저는 당시 사장인 미즈노 테츠오 씨에게 채용되었으며,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퀘어소프트는 언제나 닌텐도와 함께할 겁니다...우리와 함께 일하는 한은, 실질적으로 닌텐도에서 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입사한 다음 날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기 시작하더군요. "오, 소니로 바뀔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저는 좀 충격받았죠.

노무라 테츠야: 홀로 내려가는데 사카구치 씨가 불러세운 게 기억납니다. "이봐, 이것 좀 보라고!" 그는 플레이스테이션 로고가 등에 박힌 점퍼 자켓을 입고서 등돌아 그걸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당시 저는 제법 낮은 직책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그가 저에게 말을 걸면 저는 끄덕이면서 동의하는 위치였거든요.

키타세 요시노리: 우리가 소니로 넘어간다는 TV 광고를 냈던 거 같은데 맞죠?

노무라 테츠야: 그랬습니다. 아직 개발중인 게임에 대해 발표하는 TV 광고를 하는 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죠. 요즘은 그런 걸 하지 않습니다.

키타세 요시노리: 소년점프에도 광고를 냈던 게 기억나는군요. 소년점프는 독자가 600만이었죠. TV 광고와 동시에 전개함으로써 큰 충격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케이스 보에스키(에이도스 사장): 스퀘어는 모험정신이 강한 회사였습니다. 파이널판타지7을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내는 건 큰 리스크였죠. 아무도 플레이스테이션의 성공을 자신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도 답할 수 없었고, 대부분은 실패할 거라 생각했죠. 첫 하드웨어 사진은 변기처럼 생겨서 모두의 의심을 재확인시켰습니다.

아마노 요시타카(프리랜서 이미지 일러스트레이터): 사카구치 씨는 정말 큰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단을 내렸고 시리즈는 그 후 급격히 성장했습니다.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는 것과 실제로 성공시킨 건 놀랍습니다. FF7, 그리고 시리즈를 위해 대단한 일을 해냈죠. 당시 그에겐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겁니다.

키타세 요시노리: 우리 사장과 사카구치 씨에겐 매우 힘든 시기였죠.

사카구치 히로노부: 물론 당시 제가 스퀘어 사장은 아니었습니다. 제 위에도 경영진이 있었고, 그들과 논의해서 결정을 내렸죠. 하지만 플레이스테이션이 CD를 쓴다는 게 가장 큰 요인이었습니다. 3D 액션 게임을 닌텐도64 카트리지의 적은 용량에 넣으려 한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3D 롤플레잉 게임을 만들려고 했었죠. 제가 만들려는 게 무언지 명확히 머리 속에 있었고, 그건 닌텐도 하드웨어에선 힘든 일이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물론 저장매체였습니다. 우리 계산에 따르면 ROM 카트리지에 모든 걸 넣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플레이스테이션을 택한 주된 이유는 정말로 CD를 쓸 수 있는 유일한 콘솔이어서였습니다.

타케치 토모유키(스퀘어 사장 겸 CEO): 또한 CD는 카트리지보다 저렴했기에 더 많은 플레이어에게 가격상승 없이 게임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큰 어필이었죠.

[필자 주: 많은 이들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 자주 화자가 된 CD롬과 카트리지의 가격 차이가 스퀘어 이적의 주된 이유라고 말하지만, 일부는 하드웨어 성능차와 스퀘어/닌텐도의 커뮤니케이션 문제도 원인이었다고 말한다. 카와이 씨는 스퀘어가 닌텐도에 대한 존중 때문에 CD 대 카트리지 이야기로 범위를 좁히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90년대 초 스퀘어에 입사하면서 나오라 유스케는 롤플레잉 게임 경험 없이 파이널판타지6에 참여했다. 2년 뒤 그는 파이널판타지7의 아트 디렉터가 되었으며, 그 후 20년간 스퀘어에 있으며 많은 게임을 만들었다. 2016년 그는 파이널판타지15의 아트디렉터의 일원으로 캐릭터 작업을 마무리한 뒤 회사를 떠났다. 2016년 7월 폴리곤이 인터뷰 한 시점에서 그는 공개된 것 이상의 파이널판타지7 리메이크를 본 게 없다고 했다.

카지타니 신이치로(스퀘어 USA의 부사장): 그때 즈음 소니가 접근해왔고 이렇게 말했죠. "플레이스테이션이 나올텐데, 3D 게임을 선보이고 싶습니다. 관심 있으신가요?" 당시 우리는 닌텐도와 정말 가까웠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모르겠네요. 3D는 막 시작한 참이라서요." 그리고 닌텐도에 이 얘기를 해도 되는지 물었습니다. 소니는 이렇게 말했죠. "괜찮습니다. 당신들의 작업물을 보여주세요. 우리는 그저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알아줬으면 하는 것이고, 마음에 든다면 함께 합니다." 우리가 닌텐도와 소니 사이에 정보를 건내주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시 우리 프로그래머들은...플레이스테이션과 닌텐도64의 벤치마크 용도로 양쪽으로 프로토타입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요시나리 타츠야: 우리는 닌텐도 머신에서 원하는 걸 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N64와 PS를 왔다갔다 하면서 각 시스템에서 3D 그래픽으로 가능한 걸 살펴봤죠.

사카키바라 모토노리: 두어종류의 테스트를 보았는데 둘은 확연히 달랐습니다. 품질이 너무 차이가 났어요. 결과물이 명백했기 때문에 스퀘어가 닌텐도로 갈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고 봅니다.

카와이 히로시: 저는 그 시점에서 N64가 그렇게 잘 되어가는 것 같지 않다는 의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업무 중 하나가...N64와 플레이스테이션 프로토타입의 퍼포먼스 어플리케이션을 작성하는 것이었거든요. 그리고 둘을 비교해보기 위해 화면에 2D 스프라이트가 튀어다니고 폴리곤 카운트가 표시시키면서 60프레임이 나오는지 보았습니다. 텍스쳐나 광원을 넣기 전부터 N64는 PS의 절반 프레임도 나오지 않았어요. 물론 PS의 단점은 Z버퍼가 없다는 것으로, 폴리곤이 겹쳐서 망가자지 않도록 신경써야 한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PS 버전의 FF7을 당시엔 N64에서 돌리는 게 불가능했습니다.

언젠가 닌텐도가 저와 메인 프로그래머 나리타 씨, 그리고 FF6 데모에 참여한 리드 개발자들을 위해 여행을 준비한 적이 있습니다... 닌텐도가 스퀘어의 분위기를 감지했던 것 같아요. "당신네 하드웨어가 기대애 못 미칩니다. 순수 3D 퍼포먼스 뿐만 아니라 저장장치에서도요." 라는 신호를 말이죠.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린 이 신형 칩을 제조할 겁니다." 성능을 향상시키겠다는 의미였죠. 제 의심은 닌텐도가 SGI 측의 개선 약속을 그저 되뇌인 것 뿐이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드웨어에 대한 기대 측면에서 SGI와 닌텐도가 불일치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SGI는 좀 더 이론적으로 하드웨어에서 가능한 것에 접근하였을테고, 닌텐도는 단지 3D 렌더링 머신이 아니라 범용 기기로 만들려 했겠지요. 닌텐도는 분명 특정 퍼포먼스 기준을 갖고 있었지만 SGI와 소통이 잘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연락이...그들은 보조가 제대로 맞지 않았습니다. 닌텐도가 우리를 SGI 본사로 보내주었고, 거기서 제가 닌텐도 스페이스월드를 위해 만들던 데모를 SGI의 최신 프로토타입 하드웨어에서 구동해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퍼포먼스가 별로 나아진 게 없었죠.

대런 스미스(닌텐도 오브 아메리카 프로젝트 매니저): 1995년, 닌텐도는 저에게 차세대 콘솔 프로젝트의 북미 쪽 파트를 맡겼고, 파트너는 실리콘 그래픽스였죠. 그래서 저는 캘리포니아로 이사했고, 당시 닌텐도의 현지 풀타임 연락책이었습니다. 일본과 SGI 현지 사이의 협업을 돕는 일이었죠.

우리는 분명 스퀘어와 만났습니다. 우린 거의 모든 퍼블리셔와 만났지만, 단지 그들에게 기술에 대해 설명해주고, 어떤 게 가능한지 보여준 것 뿐이었습니다. 저는 스퀘어와 두어번 만났습니다. 그들은 3D 기술로 어떤게 가능한지 모색해본 데모를 가져와서, 어떻게 최적화할 수 있을지 물었죠...그들이 보여준 것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기억만 있습니다. 제 기억으로 텍스쳐가 입혀진 2D의 튀는 공 숫자가 늘어나는 데모가 있었습니다. 게임플레이를 보여준 적은 없었으며, 그들의 프랜차이즈와 연관시킬만한 것도 없었습니다.

카와이 히로시: 실리콘 그래픽스에서 며칠 동안 코드를 최적화해서 폴리곤 수를 늘려보려 했지만, 별로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도쿄로 돌아와서 나리타 씨와 사카구치 씨, 그리고 스퀘어의 대주주였던 미야모토 씨와의 미팅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미야모토 씨를 실제로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갑자기 들어와서는 "그래, 어떻든가?" 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질문받은 수치들을 답했지만, 나리타 씨가 주된 대화상대였습니다. 나리타 씨는 사실상 이렇게 말했죠. "프레임이 나오질 않습니다. 시그래프 데모 근처에도 못 가요." 미야모토 씨는 그저 조용히 듣고 있었고, 저는 그 후 사카구치 씨가 개인 사무실로 부르기 전까진 아무것도 듣지 못 했습니다. 그는 우릴 불러서 말하길 "우린 64는 더이상 하지 않을 거야" 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됐습니다. 저는 적어도 차세대 파이널판타지에 N64가 적합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객관적인 데이터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스퀘어의 초기 직원 중 하나인 카지타니 신이치로는 파이널판타지 첫 세 작품의 프로그래머인 나세르 제벨리와 1986년 같은 날 입사했다. 처음에 카지타니는 세일즈부터 프로그래밍, 프로덕션 관리까지 여러 직무를 전전했다. 90년대 초, 그는 스퀘어의 인사채용과 구매 업무를 맡았고, 이후 스퀘어 USA로 간 뒤 스퀘어EA의 이사가 되었다. 2002년 스퀘어를 떠난 뒤 그는 캡콤으로 갔고, 그 후에 게임리퍼블릭으로 가서 결국 CEO가 되었다. 게임리퍼블릭이 2011년 문을 닫자 그는 실리콘스튜디오의 개발/그래픽기술 팀에 들어갔다.

카지타니 신이치로: 당시 스퀘어는 닌텐도와 아주 친밀했습니다. 우린 실질적으로 세컨드파티였죠. 그래서 닌텐도가 새 시스템을 개발할 때 우린 많은 조언을 했습니다. "CD 롬이 필요해요." "우리가 하려는 걸 실행하기엔 대역폭이 부족합니다." "이 사양으로는 우린 RPG를 만들 수 없을 겁니다." 라고요. 우린 무수한 조언을 했죠. 하지만 닌텐도 사장 야마우치 씨는 하나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게 사카구치 씨와 경영진이 결정을 내린 때였죠. "좋아, 우린 이제 소니로 간다."

사카구치 히로노부: 우린 이 안건을 팀에서 출발해 회장이자 창립자인 미야모토 씨에게 가졌습니다. 궁극적으로 결정은 비즈니스 감각으로 내려야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미야모토 씨는 우리를 북돋았습니다: 만약 우리 소프트웨어 디자이너가 좋은 게임을 만들 방법이라 믿는다면, 그걸 부정하는 게 이상한 일이라고요. 미야모토 씨가 결정을 내렸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야나기하라 준이치: 미야모토 씨는 새로운 것에 눈길을 번뜩이는 비즈니스 감각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게 좋은 건지 아닌지 생각하는데 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 저는 미야모토 씨는 고심하기보다는 즉각적으로 "오, 그래. 이거 좋은 생각인 걸. 이렇게 하자고." 라고 하는 부류로 보였습니다.

타케치 토모유키: 소니는 기본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최상의 제안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쪽에서 PR과 마케팅에 대단히 힘을 써줬죠. 우리를 설득하기 위해 큰 노력을 했습니다...디테일은 말할 수 없지만 한가지 말할 수 있는 건 카피 당 로열티를 매우 적게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요시다 슈헤이(SCE의 스퀘어 담당 매니저): 저는 PR 팀의 일원으로 스퀘어 담당이었으며 제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알기는 합니다. 스퀘어 발표가 있기까지 긴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마노 요시타카: 솔직히 말해 3D로 이행이 그렇게 대단한 사건이었는진 모르겠습니다. 제가 더 주목한 건 더이상 닌텐도로 파이널판타지가 나오지 않을 거라는 거였죠. 이제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이 되는 겁니다. 그게 더 충격적이었네요.

요시다 슈헤이: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뒤 모든 게 바뀌었죠. 파이널판타지7과 드래곤퀘스트7은 원투펀치 같은 거였습니다. 적어도 일본 시장에서는 이 둘이 PS를 세대의 승리자로 만들었죠.

사카구치 히로노부: 정치적으로는 급격한 변화이고 큰 결정이었지만, 저 개인에게는 우리에게 필요한 하드웨어였기에 자연스런 선택이었습니다.

이와사키 준(스퀘어 US의 마케팅 부사장): 옳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후 닌텐도와 큰 긴장감이 생겼죠.

타케치 토모유키: 닌텐도와 관계는 매우 불편해졌습니다. 4,5년 정도는 닌텐도와 대화도 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들과 친밀감이 사라졌죠.

카지타니 신이치로: 우리가 소니로 가기로 결정했을 때, 우린 사실상 10년은 닌텐도 사무실에 들어설 수 없었습니다. 컨슈머 관점에서 두 회사가 경쟁하는 건 가격이 하락하고 더 좋은 물건이 나오기 때문에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비즈니스 관점에서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소니가 이기고 닌텐도가 지는 것이었죠. 그게 우리에게 더 좋은 일이었습니다.

해리슨 조지(닌텐도 오브 아메리카의 수석 부사장): 플레이스테이션이 카트리지 대신 CD를 들고 나왔던 때는 닌텐도가 퍼블리셔와 험난하던 시기였습니다. 닌텐도는 불법복제를 줄이기 위해 카트리지를 고수하길 원했지만, 퍼블리셔들은 CD의 용량을 원했죠. 파이널판타지처럼 그래픽이 화려한 게임에선 특히 그랬습니다.

대런 스미스: 스퀘어가 떠난 게 중대한 문제란 걸 알았고, 분명 손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저 개인에게는 그렇게 절망적인 손실은 아니었습니다. 일본에선 스퀘어가 닌텐도에게 중요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그렇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우리에게 타격이었음은 사실이고, 소니는 더 강력한 경쟁자가 되었기에 닌텐도64 프로젝트는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카와이 히로시: 감히 말하도록 하죠. 저는 닌텐도64 하드웨어로 이뤄낸 것에 상당히 감명받았습니다. 마리오, 젤다, 그런 걸 해내다니 닌텐도 개발자들은 최고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닌텐도64에서 가능한 것의 한계였죠. 파이널판타지 같은 건 만들 수 없습니다.

사카구치 히로노부: PS 이적을 결정했을 때, 스퀘어 회장(미야모토 마사후니)고 우리 리드 프로그래머(나리타 켄), 그리고 저는 야마우치 씨와 만나러 갔습니다. 교토의 오랜 전통 중 주인이 차를 내오지만 그걸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게 있죠. 그저 놔두는 게 공손한 것입니다. 그리고 야마우치 씨는 우리를 환대하면서 매우 비싼 벤토와 맥주를 내놓았고, 따뜻히 맞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돌아갈 때 이렇게 말했죠. "잘 되길 바라네." 어떤 씁쓸함이나 원한도 없었습니다.

카와이 히로시: 전 그때 사카구치 씨가 결별을 통보하는데 새련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마루야마 요시히로: 닌텐도 측 사람 누구도 우릴 힘들게 한 적이 없었던 거 같습니다. 그들은 "그래? 파이널판타지 없어도 괜찮아." 라고 말했죠. 정말 그랬어요.(웃음) 그들의 철학은 언제나 닌텐도 하드웨어는 자신들의 게임을 위해서란 것이었고, 퍼블리셔가 게임을 내고 싶어하면 "마음대로 해" 라고 했죠. 하지만 마음에 안 들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카와이 히로시: 제가 닌텐도에 들었던 말은 "떠날 거면 다신 돌아오지 마라" 였네요.

[2001년 10월, 당시 스퀘어 사장인 스즈키 히사시는 인터뷰에서 닌텐도는 스퀘어가 떠난 것보다 그 후 스퀘어가 에닉스 같은 다른 제작사들을 설득한 것에 더욱 분통해했다고 말했다. 스즈키 씨는 이번 기사의 인터뷰를 거절했다.]



요즘 기준으로는 낡았지만, 파이널판타지7의 그래픽은 1997년 당시
게임업계에 3D로 무엇이 가능한지 보여줌으로써 업계를 선도했다.


파이널판타지7: 오럴 히스토리 (1) - FF7의 기원
파이널판타지7: 오럴 히스토리 (2) - 게임 개발
파이널판타지7: 오럴 히스토리 (3) - 해외 출시
파이널판타지7: 오럴 히스토리 (4) - FF7 출시 그 후 (1)
파이널판타지7: 오럴 히스토리 (5) - FF7 출시 그 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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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ggry.lab : 500 Years Later - FF7 개발비화 무크지 2018-11-06 15:51:16 #

    ... 시 읽을 일은 없겠고 순전히 소장용으로 샀습니다. 이제 다시 비닐에 싸서 책꽂이에 꽂아놔야 겠네요. 이전에 번역한 기사는 아래 링크를 참조. 파이널판타지7: 오럴 히스토리 (1) - FF7의 기원 파이널판타지7: 오럴 히스토리 (2) - 게임 개발 파이널판타지7: 오럴 히스토리 (3) - 해외 출시 파이널판타지7: 오럴 히스토리 (4) - ... more

덧글

  • ㅈㅈㅈㅈㅈ 2017/01/25 14:46 # 삭제 답글

    이거 분량이 막대한데 한번에 다 번역하신 건가요? ㅎㄷㄷ...
  • eggry 2017/01/25 14:53 #

    4일 정도 걸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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