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2주간: 미국과 호메이니의 비밀 협상 by eggry


Two Weeks in January: America's secret engagement with Khomeini(BBC)

 1979년 1월 27일, 야아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건국자-는 그가 "거대한 사탄"이라고 불렀던 미국에 비밀 메시지를 보냈다.

 파리의 망명 거처에서, 이란 혁명의 지도자는 실질적으로 카터 행정부에 협상을 명령하고 있었다: 이란 군부는 당신을 따르겠지만, 이란 민중은 내 명령을 따를 것이오.

 만약 지미 카터 대통령이 이란 군부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이용해 자신이 나라를 장악하는 걸 도와준다면, 호메이니는 이란을 진정시킬 수 있다고 시사했다. 안정은 회복될 것이며, 이란에서의 미국의 국익과 시민의 안전은 보장될 것이었다.

 카터의 설득에 이란의 독재자 마호메드 레자 샤 팔레비는 마침내 인기 없는 총리과 그와 손이 안 맞는 군부-미군 무기와 고문에 크게 의존하는 40만 병력-를 이란에 남겨두고 해외로 "휴가"를 떠났다.

 호메이니는 군부가 과민하게 굴까봐 우려했다: 군부의 왕당파들은 그를 싫어했으며, 더 우려되는 것은 카터 대통령이 비밀스런 임무를 주어 보낸 미공군의 로버트 E. 휘서 장군과 군부가 매일 미팅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야아톨라는 추방 15년 만에 귀국을 결심했으며, 샤의 "휴가"를 영원한 휴가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은밀한 제안을 했다.




 자신이 직접 보낸 메시지에서, 호메이니는 백악관에 37년 간의 전략적 동맹국을 잃을까 패닉하지 말라고 말했으며, 자신과도 친구가 될 것이라고 보장했다.

 "우리가 미국에 특별히 악감정이 없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호메이니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슬람 공화국은 "인도주의적인 국가가 될 것이며, 전 인류의 평화와 안녕을 위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호메이니의 메시지는 새로 기밀해제된 미국정부 문서-외교 전신, 정치 메모, 회의 기록-에서 나온 것으로,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호메이니의 비밀협상을 이야기해준다. 호메이니는 곧 이슬람 원리주의와 반미주의를 전세계에 퍼뜨릴 참이었다.

 이 이야기는 여태껏 드러난 적 없었던 내용으로, 호메이니가 미국에 존중과 순종을 표하면서 그의 귀국을 이뤄냈는지에 대해 상세히 보여준다.

 아야톨라의 메시지는 사실 그의 수석 부관과 미국 정부 대변인이 프랑스에서 가졌던 2주 간의 회담의 결실이었다. 이 조용한 절차를 거쳐 호메이니는 이란으로 안전히 귀국할 수 있었고, 권좌에 올라 수십년 동안 이란과 미국의 긴장을 만들어냈다.

 혁명에 대한 이란의 공식적인 내러티브는 호메이니가 과감히 미국에 도전해 샤의 권력을 지켜내려는 "거대한 사탄"의 절박한 노력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 드러난 문서에 따르면 호메이니는 양국 정부가 인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붙임성 있었다는 걸 보여준다. 미국에 도전하기는 커녕, 오히려 아야톨라는 카터 행정부의 비위를 맞추면서 자신이 대화를 원하며, 이슬람 공화국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할 거라고 조용한 신호를 보냈다.

 오늘날까지, 전 카터 행정부 관료들은 워싱턴-실제로는 노선이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음에도-샤의 정부를 강력히 지지했다는 주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기밀문서들은 이면에 다른 늬앙스를 가진 미국의 행동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샤가 테헤란을 떠난지 겨우 이틀 뒤, 미국은 호메이니의 사절단에게 미국이 -원칙적으로- 개헌에 반대하지 않는다며, 실질적으로 왕정 폐지를 용인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국은 아야톨라에게 중요한 정보를 주었다. 이란 군부는 정치적 변화를 유연하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이다.

 40여년 전 미국과 호메이니 사이에 일어난 일은 그저 지나간 외교사가 아니다. 이슬람 공화국 내의 실용주의자들과 협상을 하고자 하는 미국의 욕구는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물론 호메이니가 남긴 반미의 아성도 여전하지만 말이다.



케네디에의 메시지

 1979년에 호메이니가 워싱턴에 접촉한 첫 사례는 아니었다.

 1963년, 아야톨라는 당시 샤의 목소리 높은 비판자로써 막 부상하던 참이었다. 6월, 호메이니는 케네디 행정부의 압박에 샤가 "백색 혁명"을 일으켜 토지개혁과 여성의 투표권을 준 것에 대해 분개하는 연설을 했다.



샤의 토지개혁과 반대파 체포를 다룬 이란 신문

 이 때문에 호메이니는 체포되었다. 즉시 3일 간의 폭력시위가 일어났으나, 군부가 신속히 진압했다.

 최근 기밀해제된 CIA 문서에 따르면 1963년 11월, 호메이니는 테헤란에 가택연금 되어 있는 동안 케네디 행정부에 대해 희귀한 지지의 메시지를 보내었다.

 군부가 시위대에 발포하고, 주모자 2명을 처형한 지 며칠 뒤였으며, 소련 국가원수의 기념비적인 방문을 앞둔 상태라 미국은 이란이 소련과 우호노선으로 기울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가운데)와 샤(왼쪽)

 호메이니는 샤의 후견자인 미 대통령에게 자신이 미국에 반하지 않는다고 이해시키려 했다.

 2008년 부분적으로 공개된 '이란의 이슬람' 이라는 CIA의 1980년 분석에 따르면 "호메이니는 자신이 이란에서의 미국의 국익에 반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고 적혀있다.

 그와 반대로, 이란에서 미국의 존재가 소련과 영국의 영향력을 억제하는데 필수적이라고 호메이니는 말했다.

 호메이니의 메시지가 들어간 대사관 전신 전문은 아직 극비이다.



 케네디가 이 메시지를 실제로 보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2주 뒤, 그는 텍사스에서 암살당햇다.

 1년 뒤, 호메이니는 이란에서 추방당했다. 그는 샤를 몇차례 공격했으며, 이번에는 이란의 미군 인사에 대한 사법권 면책에 대한 것이었다.

 "미국 대통령은 미군이 이란에서 가장 미움받는 사람이란 걸 알아야 한다." 호메이니는 추방 직전에 이렇게 말했다.

 15년 뒤, 호메이니는 파리에 있었다. 그는 혁명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이란 왕정을 무너뜨리려는 참이었다. 승리가 가까웠지만, 아야톨라는 여전히 미국이 필요했다.


핵심 플레이어들

이란

야아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
시아 무슬림의 종교지도자. 국외추방 후 1979년 파리에 살고 있었다.
야아톨라 모하마드 베헤쉬티 - 호메이니의 2인자로, 미국은 그를 실용주의자로 보았다.
이브라힘 야즈디 - 텍사스 휴스턴에 살던 이란계 미국 물리학자로, 호메이니의 대변인이자 고문이 되었다.
모하마드 레자 샤 팔레비 - 미국의 지지를 받던 이란의 마지막 왕
샤푸르 바크티아르 - 샤의 마지막 총리


카터 행정부

윌리엄 설리반 - 이란 주재 미국 대사
사이러스 반스 - 미 국무장관
워렌 짐머만 - 프랑스의 미국 대사관의 정치고문으로, 호메이니와 미국의 연락책
로버트 E. 휘서 - 1979년 1월, 카터가 비밀임무를 주고 보낸 미공군 장군



 1979년 1월 즈음, 호메이니는 모멘텀을 갖고 있었지만 최후의 순간에 미국이 개입할 것 또한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다. CIA가 샤의 권좌를 회복시켰던 1953년 쿠데타의 재현을 걱정했던 것이다.

 샤의 신임 총리 샤푸르 바크티아르가 호메이니가 계획한 1월 후반 귀국을 방해하려고 공항을 폐쇄하기 위해 병력과 전차를 배치하면서, 상황은 폭발적으로 변했다.

 이란에서 내전이 벌어질 위기처럼 보였다: 엘리트 제국수비대 사던들은 왕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호메이니의 광적인 지지자들은 악착같이 싸워 순교자가 될 준비가 되어있었다.

 백악관은 이란 내전이 미국의 전략적 이해에 큰 악영향을 미칠까 두려워했다. 여기엔 수천명의 미군 고문의 목숨, F-14 전투기와 같은 이란의 정교한 미국제 무기 시스템의 안위, 중요한 원유 공급원, 그리고 이란에서 가장 중요한 권력집단인 군부의 미래가 걸려있었다.

 미국은 사실 호메이니의 부상이나 샤의 몰락에 대해서는 덜 걱정했다.



카터 대통령과 샤 - 이란 혁명 전

 하지만 카터 대통령은 이전에도 호메이니와 이란 군부의 협상을 거절한 바 있었다.

 1978년 11월 9일, 이제는 유명해진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대비하라(Think the Unthinkable)" 라는 윌리엄 설리반 대사의 전신은 샤가 이미 파멸했음을 경고했다. 그는 워싱턴에 샤와 그의 수석 장군들을 이란에서 빼내야 하며, 하급 지휘관 및 호메이니와 협상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설리반의 과감한 제안은 카터를 아연실색하게 했으며, 둘의 관계는 수렁에 빠졌다.

 하지만 2월 초, 완고하던 대통령도 샤의 퇴임이 반대파를 진정시키기 위해 필수불가결하다고 결론내렷다.

 군사쿠데타가 임박했다는 보고 속에서, 1월 3일 카터는 수석 고문관들을 불러모았다. 짧은 토의 후, 그들은 샤에게 이란을 떠나도록 종용하기로 대략 결정했으며, 캘리포니아로 휴가를 간다는 명목을 내세울 것이었다.

 "완전한 동맥국이 아닌 이란이 꼭 미국에 후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카터는 짧은 미팅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설리반(오른쪽)은 1978년 11월, 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야 한다고 함으로써 카터와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날, 카터는 유럽의 미공군 부사령관인 로버트 E. 휘서 장군을 테헤란으로 급파해서, 샤의 장군들과 만나 바크티아르 총리를 상대로 "섯불리 쿠데타를 일으키지 말라고" 전하게 했다.

 하지만 바크티아르는 반정부파의 지지를 받지 못 했으며, 반대파는 그를 샤의 스파이라고 불렀다.

 설리반 대사는 바크티아르의 면전에선 그의 용기를 칭찬했지만 등 뒤로는 워싱턴에 총리가 "돈키호테같이" 큰 판돈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있우며, 미국의 "지시"를 듣지 않는다고 전했다.

 국무부는 바크티아르 내각이 "생존할 수 없다"고 보았다. 백악관은 대외적으론 그를 강하게 지지했지만, 비밀리에 그를 쿠데타로 몰아낼 방법을 탐색하고 있었다.

 "제 관점에서 최고의 결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은 바크티아르에 대한 군사쿠데타이며, 그 후 군부와 호메이니 사이에 협상을 해서 샤를 몰아내는 것입니다." 국가안보보좌관의 부관인 데이빗 아론이 그의 상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에게 1979년 1월 9일 이렇게 보고했다.

 "경우에 따라 협상은 바크티아르에 대한 쿠데타 없이도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덧붙였다.

 이틀 뒤, 카터는 마침내 좌절하고 암과 투병 중인 샤에게 "일시적으로 떠나있으라"고 전했다.

 그때 즈음, 미국의 국가안보 관료들 사이의 일반적 견해는 아야톨라와 그의 심복들과도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호메이니도 워싱턴에 호응했다.

 "원유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미국에 원유를 팔지 않을 거란 건 사실이 아닙니다." 호메이니는 1월 5일, 미국인 손님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워싱턴으로 이를 전하도록 했다. 손님은 대화록을 미국 대사관에 전했다.

 1월 11일, 백악관 상황실에서 중대한 미팅이 열렸다. CIA는 호메이니가 직접 권좌에 앉지 않고, 대신 온건파이자 서방에서 교육받은 호메이니의 2인자 아야톨라 모하마드 베헤쉬티가 정부를 대표할 것이라 예상했다.

 베히쉬티는 미국 관료들에게 귀한 존재였다: 실용주의적이며, 영어를 할 줄 아는 이 성직자는 대학교육을 받았으며, 서방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으면서도 호메이니와 친밀했다. 한마디로 그는 미국이 기대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가 실권에서 분리되면 우리는 그를 단지 분리식 교육과 여성인권의 침해자로써 비난할 수 있습니다." 국무부 정보부의 보스인 필립 스토다드가 말했다.

 카터는 휘서 장군이 테헤란에 도착했다는 소식에 안도했다. 휘서는 명령을 잘 따랐으며, 이란 군부의 신임을 얻었다.

 일단 이란에 도착하자 휘서는 군부 고위층을 진정시키고 "양보하도록" 설득해서 베헤쉬티와 접견하도록 했다. 미국은 이런 회견이 호메니이가 군부에 "친숙해지도록"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교착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카터도 자신의 양보를 했다. 1월 14일 밤, 국무장관 사이러스 반스가 파리와 테헤란의 대사관에 전신을 보냈다. "우리는 호메이니의 측근과 직통 채널을 개설하길 원한다."



사이러스 국무장관과 지미 카터 대통령


비밀 회담

 1월 15일 점심 즈음, 프랑스 주재 미국대사관의 워렌 짐머만이 파리 외곽의 작은 마을 노플르 르 샤또의 조용한 여관에 도착했다. 호메이니는 이곳에 살고 있었다. 짐머만은 상관의 개인 푸조를 빌렸는데, 외교관 번호판이 없어서 추적을 따돌리기 위함이었다.

 "저는 여관에 들어갔고, 텅 빈 큰 식당엔 한명만 앉아있었습니다. 그가 야즈디였죠." 짐머만이 수년 뒤 이렇게 구술했다.

 이브라힘 야즈디는 호메이니의 수석 보좌관으로, 이란계 미국 물리학자였다.

 텍사스 휴스턴의 주민이기도 했던 야즈디는 리버럴, 안티 샤 학자로 변절한 전 CIA 요원 리처드 코탐을 통해 워싱턴의 관료와 연줄을 갖고 있었다.

 호메이니와 직통라인을 만드는 것은 대단히 민감한 주제였다. 만약 직통라인의 존재가 드러난다면 미국의 정책이 변화했다는 것으로 해석될 것이며, 전세계가 워싱턴이 옛 친구 샤를 내팽개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타임라인



이란에서 샤의 축출을 축하하는 헤드라인

1953년: 모하마드 레자 샤 팔레비가 미국, 영국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로 총리를 끌어내리면서 권좌를 회복하다.
1963년: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샤를 비난하여 유명해지다.
1979년 1월 15일: 호메이니가 프랑스에서 카터 행정부와 2주 간의 협상에 들어가다.
1979년 1월 16일: 이란이 내전상황으로 다가가는 동안 샤가 이란을 떠나다.
1979년 2월 1일: 호메이니가 테헤란으로 돌아오며, 수백만명이 거리로 나와 그를 이란 혁명의 지도자로 환영하다.


 그날 일찍, 반스 국무장관은 프랑스 정부에 워싱턴이 호메이니 그룹과 직접 연락할 수단이 급히 필요하다고 전했다. 테헤란에서 바헤쉬티와 샤의 군부 및 정보부와의 비밀협상에 호메이니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베헤쉬티는 설리반은 만났지만 신변 문제로 군부와 만나는 것은 거부했다. 그래서 워싱턴은 마침내 호메이니에게 그의 부관에게 "미팅 장소에 대해" 유연성을 발휘하게 해달라고 요청해야 했다고 반스는 적고 있다.

 두번째 미팅은 재빨리 잡혔으며, 짐머만은 군부가 샤의 출국에 맞춰 쿠데타 계획을 진지하게 논했지만 휘서 장군이 만류했다고 전해들었다. 육군은 "협상기간 중 침착했으며, 병사들은 흥분하지 않았다" 고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 전신은 말한다.

 1월 17일, 카터는 자신의 일기에 호메이니를 이란에 도착하지 못 하게 힘쓰고 있다고 적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 행정부는 호메이니에 그의 "질서정연한" 귀향에 어떤 문제도 없다고 말했다.

 카터 행정부는 호메이니와 비밀 회담을 시작했으며, 주된 화제는 아야톨라와 군부 사이의 허황된 협상을 타결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미국은 호메이니의 귀국을 늦춤으로써 모멘텀을 저지하거나, 그의 심중을 읽으려고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이것 중 어느것도 성공하지 못 했다.

 호메이니는 협상이 아니라 확고한 승리를 원했다. 하지만 워싱턴과의 전술적 접촉은 그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 사실 호메이니는 카터 행정부의 샤 정권 지지와 이란 군부의 노선을 확인할 몇가지 방법이 있었다.

 아야톨라는 그들의 속을 알아내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미국은 쉽게 그들의 패를 내보였다.



'헌법을 보호한다'?

 짐머만과 야즈디가 세번째 만날 때 즈음, 그들은 각자에게 좋은 소식이 있었다. 그때는 1979년 1월 18일 아침이었다. 장소는 마찬가지로 파리 외곽의 호메이니의 조용한 여관이었다.

 호메이니는 베헤쉬티에게 장군들과 만나도록 허락했다고 야즈디가 알려주었다. 그리고 짐머만은 아야톨라에게 전달할 중대한 성명이 있었다.

 두번째 미팅 중, 워싱턴은 호메이니에게 "갑작스런 귀환"이 재앙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으며, 이란 군부가 "헌법을 보호하기 위해" 행동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헌법에는 왕정이 "영원히 불변한다"고 기술되어 있었다.

 하지만 "헌법을 보호한다" 라는 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가? 왕정을 보호하겠다는 것인가? 혹은 군부의 지위를 지켜내겠다는 것인가? 호메이니는 명확한 정의를 원했다.

 더 직설적으로, 미국은 이란 군부가 팔레비 정권을 포기했으며, "새로운 민주적 공화정의 틀에서 일할 용의가 있는가?"

 워싱턴은 의사를 분명히 하는데 이틀이 걸렸다. 35년 간 비밀에 부쳐져 온 미국의 답은, 미국이 이란의 정치 시스템에 대해 "유연성을 가질 것"이라고 호메이니에게 확인해주었다.



 대부분의 공식 성명과 마찬가지로, 메시지는 일반론적 얘기로 시작한다. 요점은 끝에 적혀있었다.

 "우리는 헌법이 바뀔 수 없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이미 정립되어 있는 적합한 절차를 거쳐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군부의 지위가 보장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란이 장래에 어떤 정치형태를 택하든 간에 지지할 전망입니다."

 다른 말로, 워싱턴은 근본적으로 왕정 폐지를 허용한다는 것이며, 휘서 장군과 매일 만나고 있는 군부의 최고위층은 정치적 변혁이 점진적이고 통제되는 한 결과를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호메이니의 가장 큰 우려는 막강한 미국이 최후의 순간에 샤를 구하기 위해 쿠데타를 벌이는 것이었다. 그 대신, 그는 미국이 샤가 끝났다고 여긴다는 걸 분명히 확인했으며, 군부를 보호해 체면을 차릴 방법을 찾고 있으며 공산주의혁명을 걱정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여느때처럼, 호메이니의 수석 보좌관은 이란에서 "대량의 노트를 작성해" 아야톨라에게 전달했다.

 짐머만은 호메이니 측이 메시지를 정확히 이해했는지 확인하고 싶어했다.

 "짐머만이 헌법 문구에 대해 설명한 한편, 그는 야즈디의 주된 관심사를 마지막 두 문장으로 돌렸으며, 야즈디가 미국의 헌법에 대한 유연한 관점을 이해하고 전하길 바랬다." 프랑스의 미국 대사가 워싱턴에 별개의 전신으로 이렇게 전했다.

 미국은 사실상 호메이니에게 군부가 통제력을 잃었다고 시인한 셈이었다. "장교들은 미지의 사태를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불명확한 미래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짐머만이 야즈디에게 같은 미팅에서 이렇게 말했다.

 워싱턴을 안심시키기 위해, 아야톨라는 군부를 파괴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의 사절은 미국이 이란에서 첨단무기를 빼내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야즈디는 또한 이슬람 공화국이 이스라엘과 자국의 유대인 거주민을 분리해서 생각할 것이라고 확인해주었다. 이란의 불안 속에 유대인들은 이미 나라를 떠나고 있었다.

 "미국 유대인들에게 이란 유대인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도 됩니다." 그가 말했다.

 호메이니와 카터는 모두 군부와 반정부세력의 무력충돌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둘의 목표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카터는 군부를 보존하고 싶었으며-설리반은 군부를 예측 불가능한 "상처 입은 동물"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훗날 강력한 예비수단으로 쓸 수 있길 기대했다.

 하지만 호메이니는 짐승을 가두고 끝장내고 싶어했다. 군부는 그의 정권에 장기적 위협이었다. 군부의 파면과 파멸이 그의 최우선 과제였다.

 워싱턴은 왕정의 미래와 군부의 의향에 대한 호메이니의 질문에 답했다. 이제 아야톨라의 차례였다. 카터 행정부는 이란에서 미국의 핵심 이익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미국의 자산, 원유 수출, 정치-군사적 관계, 그리고 소련에 대한 관점 말이다.

 호메이니는 이 질문들에 대해 바로 다음날 답한 뒤 야즈디를 통해 돌려보냈다.



호메이니는 이란 인들에게 시위를 확대하라고 호소했다.
같은 날 짐머만은 야즈디에게 군부가 유연성 있을 것이라 말했다.

 호메이니의 답변은 카터가 과들루프 섬에서 세계 지도자들과의 회견에서 그렸던 이상적인 이슬람 공화국의 초상이었다: 이란은 소련과 친교하지 않으며, 미국의 우방이 아닐지라도 중립을 지킬 것이다, 혁명을 수출하지 않을 것이다, 서방에 원유를 계속 수출할 것이다.

 "우리는 정당한 값만 받는다면 누구에게나 원유를 팔 것입니다." 호메이니는 이렇게 적었다.

 "원유 수출은 이슬람 공화국 건국 후에도 두 나라만 제외하고 계속될 것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이스라엘이 예외입니다." 그가 덧붙였다.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해 이란은 다른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며 "특히 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호메이니는 적었다.

 외국인 투자에 대해서, 미국도 제 역할을 받을 것 같았다. 호메이니는 이슬람 공화국이 전차가 아니라 트랙터를 구입할 것이며, 러시아인들에 대해 "별다른 호감"이 없다고 분명히 했다.

 "러시아 정부는 무신론자이고 반종교적입니다. 우리는 분명 러시아인들과 이해하기 더 어려울 것입니다." 야즈디가 짐머만에게 답을 전하면서 덧붙였다.

 "당신들은 기독교도이고, 신을 믿습니다. 러시아 인들은 아닙니다. 우리는 러시아 인보다 당신들이 더 가깝다고 느낍니다."

 호메이니는 또한 지역을 불안정하게 만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다른 민족의 문제에 불간섭할 것입니다." 그는 미래 정부의 정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슬람 공화국은 샤 정권과 달리 걸프의 경찰을 자처하지 않을테지만, 또한 혁명도 수출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사우디, 쿠웨이트, 혹은 이라크의 민중들로 하여금 외국인을 쫒아내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호메이니는 이렇게 적었다.

 이란의 혼란은 이란의 이웃 아랍국들에게 경각심을 가지게 했다. 샤의 몰락 후 공산주의자들이 이란을 차지할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CIA의 평가는 아랍 보수주의자들이 호메이니나 그의 정권이 오래 지속되지 못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결론내렸다.

 하지만 아야톨라는 머지 않아 그를 지지했던 공산주의자들을 일소하게 된다. 좌파 청산에 앞서 호메이니와 그의 과격한 신봉자들은 야즈디를 포함한 온건파들부터 몰아내었으며, 그들을 친미적이고 진짜 혁명전사가 아니라고 몰아세웠다.

 1월 24일, 야아톨라 모사비 아르데빌리-훗날 수천명의 정적을 처형하는데 주된 역할을 한 이슬람 공화국의 대법관-를 포함한 비밀 이슬람 혁명 위원회의 핵심 멤버들들이 설리반 미 대사를 만났다.

 아르데빌리는 합리적으로 보였다. 그는 강경한 타입이었지만, 설리반은 워싱턴에 그가 "광신도는 아니라"고 보고했다.

 3일 뒤, 호메이니는 스스로 백악관에 직접 접촉했다.

 "군부에게 바크티아르 총리를 따르지 말라고 권고하길 권합니다." 호메이니의 "첫 직접 메시지"는 1월 27일 전달되었다.

 호메이니는 세가지 요구사항이 있었다: 말끔한 귀국, 현 정부의 사임, 그리고 군부의 항복이었다.

 아야톨라는 또한 만약 군부가 탄압한다면, 그의 지지자들은 이란 내의 미국인에 대해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넌지시 경고했다.

 그래도 아직까지 그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끝나야 한다고 하면서, 신속하게 평화적 해결책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야즈디를 거쳐 프랑스의 미국 대사관을 통해 전달된 이 메시지는 미국 정부 최고위 레벨에 도달했다.



 1월 27일의 전화통화에서, 국방장관 해롤드 브라운은 휘서 장군에게 호메이니의 비밀 메시지와 그에 대해 대통령과 논한 것을 전했다. 브라운은 휘서에게 호메니이의 귀국이 "전술적" 문제이며, 이란 당국이 감당해야 할 건이라고 분명히 했다.

 행정부는 아야톨라가 직접 연락을 취하기로 동의한 것에 흡족해했으며, 대화를 계속하고 싶어했다고 새로 기밀해제된 워싱턴의 문서 초안에 적혀있다.

 이 초안에는 호메이니에게 새로운 정부를 설립하지 말고, 현 정부와 대화를 통해 혼란을 해소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초안은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의 피드백을 받기 위해 보내졌지만, 결국 보관소로 보내져서 호메이니에겐 도달하지 못 했다.

 하지만 이미 상관 없는 문제였다. 곧 아야톨라는 이란으로 돌아갈테니 말이다.


옵션 C


테헤란으로 개선하기 위해 비행기에 오른 호메이니

 워싱턴은 이미 장군들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함으로써 호메이니의 핵심 요구조건 중 일부를 암묵적으로 들어준 셈이었다. 휘서 장군은 군부에 호메이니의 귀국만으론 "옵션 C"를 발동시킬 충분한 조건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옵션 C는 쿠데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월 29일, 바크티아르 총리는 호메이니에게 이란 영공을 열라는 큰 압박을 받고 있었다. 바크티아르는 자신만의 플랜B로 기울었다: 호메이니는 종교도시 콤에서 "성직자들 속에서 익사하게 될 것" 이었다.

 "그를 종교인사들에 둘러싸이게 함으로써 좀 더 합리적이되게 하거나, 적어도 정치에 덜 관여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호메이니의 물결에 휩쓸리기 2주 전, 그는 미국 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야톨라의 귀국 이틀 전, 샤의 최고 지휘관은 호메이니의 대변인에게 군부가 "내각 개편"을 포함한 정치적 변화에 더이상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해주었다.

 "적법한 절차를 따른다면 개헌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합니다." 호메이니 진영의 믿을 만한 정보통이 미국 대사에 이렇게 전했다고 2013년 11월 기밀해제된 전신에 나와있다.

 미국 대사는 흡족했다. "군부가 호메이니의 귀국을 받아들인 듯 하며, 헌법이 존중되는 한 이슬람 운동과 협력할 준비가 되어있는 듯 합니다." 설리반이 워싱턴에 보고했다.



 호메이니는 2월 1일 아침 테헤란 공항에 도착했으며, 수천명의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였다. 며칠 안에 그는 별개의 총리를 지명했다.

 그때까지도 군부는 변화가 "합법적이고 점진적인 한" 정부개편에 문제가 없다고 1979년 2월 5일의 CIA 보고서에 적혀있다. 이 문서는 2016년에야 기밀해제되었다.

 이 시점에서, 군의 결집력은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많은 하급장교와 사병들이 이제 호메이니 편이었다.

 곧 공군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반정부세력이 무장봉기 한 뒤, 과격파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함께 테헤란의 육군기지와 경찰서를 공격했다.

 군부는 내전을 벌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바크티아르 몰래 그들은 긴급 회의를 열어 중립을 선언했다. 실질적으로 군부는 항복한 것이었다. 샤의 총리는 이제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호메이니가 혁명의 첫 승리를 맛본 그 날, 카터 대통령은 워싱턴에 없었다. 주말 동안 그는 캠프 데이빗에서 스키를 타고 있었다. 2월 11일 일요일 아침, 카터와 국무장관은 교회에 있어 연락이 닿지 않았다.

 행정부 최고위직들이 부재한 동안, 국가안보좌관이 백악관 상황실에서 대책회의를 주관했다.

 한때 강대했던 이란 군은 붕괴되었으나, 카터 행정부에서 가장 친왕정이었던 브레진스키는 여전히 옵션 C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군부의 상태 때문에 쿠데타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카터 행정부에서 샤의 강경한 지지자 중 하나였다.

 곧 휘서 장군이 유럽에서 보안통신으로 상황실에 연결되었다. 휘서 장군은 그가 테헤란에서 샤의 군부를 무력화 했으며, 호메이니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받았고, 그는 완강히 부인했다. 그가 워싱턴에 돌아온 뒤 작성한 보고서 대부분은 아직 극비이다.

 하지만 2월 11일, 휘서의 논조는 약간 달랐으며, 군부가 스스로 포기한 것에 대해 전혀 놀라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나 군부에게 협상을 하라고 요구했었습니다." 통화 녹취록에서 휘서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메흐디 바자르간에게 직접 갔어야 했습니다." 그는 호메이니가 자신의 총리로 임명한 온건 이슬람주의자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군부의 이 모든 양보도 호메이니에겐 부족했다. 2월 15일, 4명의 고위 장군들이 고등학교 지붕에서 약식처형 당했다. 이는 앞으로 벌어질 처형의 시작일 뿐이었다.

 많은 이들이 카터 행정부가-첩보실패와 내부 분열 때문에- 샤의 급속한 몰락을 그저 지켜만 봤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제, 이란 혁명의 마지막 단계에서 미국은 샤와 호메이니 양측에 발을 담굼으로써 샤 정권의 몰락에서 연착륙을 기대했다는 게 분명히 드러났다.

 하지만 카터의 도박은 거대한 실패로 드러났다. 진짜 위협이 간과되었으며, 호메이니의 야심이 과소평가 되었다. 그의 행동도 잘못 읽혀졌다.

 카터와 달리, 호메이니는 일관성 있게 전략을 추진했으며 능숙능란하게 수완을 발휘했다. 이슬람 공화국을 건설하겠다는 분명한 비전에 인도되어 아야톨라는 미국에 공허한 약속을 내걸었으며, 그들의 의중을 파해치고, 승리로 행진하였다.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호메이니는-이란 인질 사태에서 미국 부대사와 수십명의 미국인을 인질로 잡으며- 이렇게 선언했다: "미국은 우리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 한다."

 그 후 그는 혁명 1주년을 중대한 선언으로 축하했다: 이란은 전세계에 미제국주의와의 항쟁을 벌일 것이다.

 "우리는 혁명을 전세계로 수출할 것입니다." 그가 다시 한번 단언했다. "이것은 이슬람 혁명입니다."



덧글

  • 데오늬 2016/06/12 23:13 # 답글

    뒤늦게 보게 되네요. 장문의 번역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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